[엄상익의 시선]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사람들

국정원 원훈석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국정원 홈페이지 캡처>

“그들의 내면에서 훈훈함을 느꼈다”

정보요원이라고 하면 자기를 안개 속에 두고 있는 것 같은 존재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정보요원을 희화화하는 만화를 보면 꼭 검은 안경을 쓰고 무표정한 캐릭터였다. 나는 그런 정보요원들의 본체를 보고 싶었다. 그들을 먼 기억 저쪽에서 끌어내기 위해 나는 36년 전 풍경 속으로 들어 간다.

긴장감이 감도는 특전사령부 연병장이 희미하게 나타난다. 정보요원들이 투구같은 무거운 헬멧에 낙하산 보따리를 등에 지고 “공 수 멸 공 공 수 멸 공”이라고 구호를 외치면서 뛰고 있다. 근처 사격장에서 “타 타 타” 하고 연발사격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다.

나도 그들과 함께 내무반에 묵으면서 공수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 어느 날 훈련이 끝난 후 뜨거운 탕에 들어가 피로를 씻은 후 복도 끝에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근처 벤치에 앉아있을 때였다. 교육대장이 다가와 옆에 앉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도 오랜만에 재미 삼아 낙하산을 타봤는데 바람을 잘못 잡았는지 거꾸로 날아가더라구. 그러니까 뒷통수 방향으로 가는 거야. 앞을 보면서 가야 가뿐히 땅에 내리는 데 뒤로 가니까 불안하더라구. 잘못하면 뒷통수를 바위에 쳐박고 다칠 수도 있잖아?”

도대체 그는 겁이 없어 보였다. 공수훈련을 받는 특전사령부 군인들도 처음에는 허공에 뜬 낡은 비행기 안에서 까마득히 아래로 보이는 땅을 보면 겁에 질려 얼어붙어 버릴 것 같다고 했다. 뒤에서 누군가 발로 차 줘야지 혼자 뛰기는 무섭다고 했다. 교육대장은 재미삼아 한다고 했다.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 같은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교육대장은 나를 친구같이 살갑게 대했다. 그러면서 극기훈련이 주는 의미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같이 부대 밖에 나가 차 한잔 하고 돌아올까?”

그가 내게 제안했다. 우리는 자유였다. 언제든지 부대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연병장 구석에 세워둔 코란도를 타고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으로 가서 앉았다. 그가 스스럼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고 대학도 일류를 나오지 못했어. 그냥 허름한 아파트에서 아내, 아들과 살고 있지. 안전기획부에서 받는 월급이 사회에서 취직한 친구들에 비하면 괜찮은 셈이라 이만하면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같은 안전기획부라도 분야에 따라 사람들의 삶이 달라. 좋은 대학을 나오고 국내정보국에서 일하는 정보관들은 기자처럼 출입처를 가지고 있어. 그 기관에서 대접받고 더러 이권에도 관여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지. 해외를 담당하는 정보관들은 외교관 자격으로 근무하기도 하지. 나는 그런 화려한 보직이 아니야. 남이 하지 않는 이런 교육대장을 하고 있지. 앞으로도 인기 없는 대공업무 쪽에서 일하게 될 거야. 힘들고 빛이 나지 않아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해.”

그가 잠시 말을 끊고 의문을 가진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솔직히 변호사가 왜 이런 훈련과정에 스스로 참여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데 말이야. 하여튼 사람마다 살아가는 게 다르니까 자존심에 훈련을 무리하게 따라가려고 하지 마. 다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교육 받는 요원들과 친한 관계를 맺었으면 해. 저 사람들의 애로사항이나 정신세계를 파악해서 형님 같이 조언해 주기도 하구 말이지. 그리고 그 사항들을 더러 내게 알려주면 나도 교육대장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저 훈련 시키는 요원들과 이렇게 관계를 맺으면 그 인연이 끈끈하게 오래 지속될 운명이거든. 나는 엄상익 변호사를 부교육대장 쯤으로 생각하고 있어. 도와주면 좋겠어.”

겸손하게 마음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그는 좋은 사람 같았다. 속에 시기와 질투가 있으면 티를 내지 않으면서 얼마든지 괴롭힐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나는 그를 지켜봤다.

현실에 만족하고 소박한 삶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나는 훈련 받는 요원들과 같이 땀 흘리고 밥 먹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친해져 갔다. 한번은 항상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앉아 쉬고 있는 공군사관학교를 나온 대위에게 물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빨간 마후라를 매고 전투기를 조정하는 파일럿이 왜 여기에 있어요?”

“형님이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는 비행기를 타는 게 죽는 것보다 싫었어요. 새까만 밤중에 전투기 타고 하늘로 올라가 혼자 있어 보세요. 몇 바퀴 회전하고 나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땅인지 구분이 안돼요. 구름 속에 들어가 있으면 나 혼자 있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에 있으려고 여기로 온 거죠.”

그들 역시 사람 사는 세상에서 비벼대면서 같이 살고 싶어 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착한 이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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