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1970년대 중동근로자 “손자가 공사현장 잡부예요”

중동근로자의 망중한. 지금 동해안 실버타운의 노인의 마음도 그러하길…


전세계 최고 가난했던 대한민국을 부자나라로 만든 자부심으로

실버타운의 엘리베이터에서 낯익은 노인과 만났다. 젊은 시절 모래바람과 뜨거운 지열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보냈다고 했다. 팔십에 가까운 그는 이따금씩 실버타운의 어둠침침한 복도나 적막한 로비에서 초등학교 아이가 벌을 받듯 한참 동안을 혼자 있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실버타운 직원의 말에 의하면 부인한테 쫓겨나 혼이 나는 순간이라고 했다. 기다렸다가 부인의 화가 풀리면 슬며시 들어간다고 했다. 우리의 소년시절, 가장의 권위가 엄했다. 부인들이 한마디 거들면 남편들은 “어디 여자가 감히?” 하면서 권위로 눌렀다.

그러다 ‘삼식이 남편’이라는 우스개소리가 들리더니 그게 현실이 됐다. 실버타운의 어떤 부인은 팔십 나이의 남편 보고 “병신같이 행동하고 있어”라고 하면서 화를 내는 모습도 봤다. 젊어서 일하고 늙어서 돈을 벌지 못하면 천대받는 경향이 있다.

어느 날 저녁 그 노인은 공동식당 구석에 있는 식탁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부인이 아파서 병원에 간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옆 식탁에 가서 앉았다. 그가 나를 보더니 속삭이듯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대학에 입학한 우리 손자놈이 알바로 공사현장 노가다를 뛰었어요. 내가 젊어서 중동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를 했죠. 우리 아들도 건설현장에서 뛰었어요. 그러다가 알바지만 손자가 그 일을 하는 거죠. 이놈이 용돈벌이로 일용잡부를 하려고 하는데 공사현장에 일자리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지 애비 빽으로 노가다 일을 잡았다고 그래요. 그 돈을 착실히 모았다고 그래요.”

“손자가 땀흘리는 노동도 알고 성실해서 좋으시겠어요” 내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가 신이 나서 말을 계속했다. “내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손자 놈한테 전화를 해서 돈 좀 꿔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이놈이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있더라구요. 그러다가 하는 말이 ‘할아버지 나중에 돈 갚으실 거죠?’ 하고 묻더라구요. 요새 아이들은 돈관념이 철저해요. 그래서 내가 최고의 사채이자로 갚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손자가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의 어조와 표정에서 할아버지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나는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내가 원래 외아들이예요. 귀한 자식이었죠. 그러니 중고등학교 때 어머니가 산에 가면 산에 간다고 걱정, 물에 가면 물에 간다고 걱정 내가 어떻게 될까 봐 벌벌 떨었어요. 집안의 대가 끊어질까 봐 그런 거죠. 그런 귀한 외아들이 중동 건설 때 제일 먼저 험한 그곳으로 갔다니까요.”

중동근로자들 현장

“초창기 중동쪽 건설 현장은 어땠어요?” 내가 물었다.

“그때는 북한 노동자들도 공사현장에 나와서 일했어요. 북한쪽이 우리보다 경제 사정이 좋은 것 같았어요. 우리는 저녁이면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작업복 채로 찜통 같은 컨테이너 숙소에 있는데 북한 노동자들은 목욕하고 양복을 싹 갈아입고는 우리 앞을 지나면서 같이 놀러가자고 약을 올리는 거예요. 욕을 해줬죠. 초창기 중동 건설현장에서 우리는 참 고생이 많았어요. 전쟁 때 이라크 전투기가 공사현장을 공습한다고 미리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어요. 공습이 예견됐으면 노동자들을 대피시켜야 하는데 본사에서는 작업장을 뜨지 말라고 명령이 내려오는 거예요. 작업장을 이탈하면 일을 안했으니까 수당지급을 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래서 적기 공습을 알고도 일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어요.”

내가 모르던 개발시대 자화상이었다. 그가 덧붙였다.

“우리 세대가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벌어들인 달러로 공장을 짓고 나라가 발전했죠. 우리는 그게 어떤 전쟁인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베트남이 독립전쟁을 하는데 미국이 끼어든 거래요. 그래서 국제적으로 여론이 좋지 않고 미국 내에서도 반전운동이 일어난 거래요. 참전한 우리 군인들을 보면 힘없고 가난한 집 자식들만 죽고 다치고 고엽제 때문에 평생 중독되기도 했어요. 높은 놈들이나 돈 있는 집 자식들이 참전한 걸 보지 못했어요. 우린 그런 세월을 살아내고 여기 실버타운까지 흘러 들어온 거예요. 요즈음 젊은이들은 이 좋은 세상을 ‘헬 조선’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은 고려장이라도 지내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로 여긴다니까. 지금이라도 나머지 세월을 즐겁게 보내야죠. 참 오늘 손자 자랑했으니 내가 읍내에 가서 삼겹살이라도 낼게요.”

그야말로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이루는 데 기여한 전사이고 일꾼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술이 약간 부어 있었다.

“어디 아파요?” 내가 물었다.

“아니요. 주민센터에 가서 하모니카를 배우는데 연습을 하다가 입술이 터졌어요. 수강생이 전부 할머니들인데 그중에 나만 할아버지야. 쑥스러워도 그냥 배우고 있어요. 가을부터 주민센터에서 목공 기술을 가르쳐 준대요. 내가 추천하면 엄 변호사도 받아줄 거예요. 목공을 한번 배워보지 않을래요?”

“감사하죠.”

그는 우리의 살아있는 현대사였다. 가난한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가장 거지였던 우리나라를 부자나라로 만든 원동력들이었다. 노년의 황혼에 약간 쉬는 것을 폐기물 보듯 하지 않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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