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자살을 생각하는 당신께
드넓게 누워 있는 바다 위로 새벽의 푸른 여명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하얀 거품을 얹은 파도가 밀려오는 적막한 해변을 걷고 있었다. 우연히 축축한 모래밭 위에 나란히 놓인 빈 소주병 두 개를 보았다. 소주병이 이상하게 뭔지 내게 말을 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옆에는 누군가 앉아 있었던 듯한 자리가 보였다. 별빛 아래 출렁거리는 검은 바다를 보면서 누군가 소주를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일까. 몇 걸음 더 걸어가니까 조수가 빠져나가 단단해진 모래 위에 주인을 잃은 신발이 보였다. 지난밤 신발 주인이 검은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인적없는 밤바다는 그의 사멸에 침묵했을 것이다.
갑자기 뇌리에서 한 기억이 꿈틀거리며 나타났다. 몇년 전 더러 만나던 어린 시절 친구가 여수 앞바다의 작은 섬마을로 들어간 후 종적을 감추었다. 회사에서 퇴직하고 사기를 당한 그는 노년의 긴긴 날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스스로 삶에 마침표를 찍는 걸 봤다. 지난해에는 10여년 감옥생활을 뒷바라지 했던 살인범의 자살 뒷 처리를 한 적이 있다. 그는 석방된 후 그 누구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것 같다. 어떤 직장에서도 그를 꺼린다는 걸 눈치챘다. 남은 다 아는 데 본인만 몰랐던 것 같다. 그는 목을 맸다. 죽은 후에도 그는 고독했다. 화장장 소각로 앞에서 옆에 앉아 있을 지도 모르는 그의 영혼에게 내가 물었다. 정말 그 길 밖에 없었느냐고. 누구에게라도 먼저 사랑 한모금 준 적이 있느냐고.
나는 그가 죽음을 서두르지 말고 힘들어 하는 사람을 한번 부축이라도 해보는 봉사를 했었으면 했다. 생명은 하나님께 받은 귀한 선물인데도 일회용 물품처럼 너무들 쉽게 던져버렸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나쁘다고 강에 가서 빠져죽은 친구를 봤다. 대학 시절 고시 1차에 낙방했다고 하숙방에서 자살한 친구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40분마다 한 명씩 자살을 한다는 통계를 봤다. 자살은 지위나 학력과 무관했다. 의뢰인이 맡긴 사건에서 시효를 넘기는 실수를 했다고 자살한 변호사를 보기도 했다.
한 원로기자가 점심 시간 무렵 박원순 서울시장의 실종을 내게 전화로 알려주었다. 박 시장과 내가 친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쫓기듯 집을 나가 몇 시간 후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허망한 죽음이었다.
부하의 여자를 빼앗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다윗도 있었다. 구스(에티오피아) 여자와의 불륜으로 공개적 비난을 받은 모세도 있었다. 박 시장은 남들이 자신을 증류수같이 맑거나 마네킹으로 볼 것으로 착각했던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이나 노회찬 의원이 산이나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도 어떤 결벽증 비슷한 건 아닐까.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한 판사가 있었다. 변호사를 개업한 그가 내게 고민을 얘기했다. 정부가 해외에 투자한 기업의 형식상의 사장을 하면서 주식을 샀는데 언론이 그걸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 후 그가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워놓고 자살했다는 신문보도를 봤다.
난관에 부딪치면 더 이상 갈데가 없다고 속단하고 죽음 저쪽으로 얼른 피하는 것 같았다. 죽음으로 도피하면 걱정이나 책임이 증발하고 평화로운 무(無)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일까.
죽은 아내를 따라가겠다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죽어 보니까 아내가 사는 세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어둠침침하고 음습한 깜깜한 공간 속에 있더라는 것이다. 순간 후회가 막심했다고 했다.
명문고와 명문대를 나오고 동경대학에서 유학한 친구가 있었다. 장관의 아들로 재벌집 맏사위가 되어 경영권을 승계한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었다. 그와 회장인 장인과 불꽃 튀기는 자존심 대결이 있었다. 그가 강인하고 냉정한 장인에게 패배할 것 같자 분에 못 이겨 한강에서 뛰어내렸다.
자살에 실패하자 그는 다시 호텔방에서 칼로 배를 그었다가 또 실패하고 병원에 실려 갔다. 병원에 실려 간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 다시 몸을 던졌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 두개골의 일부가 부서졌지만 살아났다. 마지막 수술을 바로 앞두었을 때 중환자실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이제는 살고 싶지?”라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잠시 후 수술실에 들어간 그는 싸늘한 시신이 되어 나왔다.
자살을 하는 순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자살에 실패한 대학동기가 있다. 그는 그 순간의 감정을 내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기둥에 혁대를 묶고 의자에 올라 목을 맸어. 의자를 발로 차고 허공에 매달리는 순간 바로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죽고 싶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더라구. 그러면서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괜히 목을 매단 것 같았어. 순간 쿵하고 엉덩방아를 찌면서 방바닥에 나가떨어졌어. 눈에 별이 보일 정도로 아팠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혁대의 버클부분이 약해서 빠져버린거야. 그 찰나의 고통이 일생의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큰 느낌이었다고 할까.”
생명은 가장 고귀한 신의 선물이 아닐까. 죽어가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전 재산을 다 줄 테니 죽어달라고 해도 그 요구에 응할 사람이 없을 것 같다. 그런 귀중한 신의 선물을 순간의 고민으로 내팽개치는 사람들이 많다.
순간의 슬픔이나 불행도 삶이라는 그림의 한 조각이 아닐까. 인생이란 희망과 성공뿐 아니라 절망이나 실패까지 있어야 그림이 제대로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ㅎㅎ 죽은자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