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일흔살 ‘나’, 좀더 정직해 아무 후회 없이 죽었으면”

“그럭저럭 칠십 고개를 넘었다. 조용한 바닷가에서 요즈음 나는 내 자신이 좀더 행복해 지려고 박차를 가한다. 좀더 솔직해지고 싶다.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나의 생각과 감정에 좀더 정직해지고 싶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짜 죽음에 임할 때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었으면 좋겠다. 삶의 고비들은 나를 초원으로 모는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아니었을까.”(본문 가운데) <사진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삶에서 여러 고비가 있었다. 17살때 재벌집 아들의 칼에 얼굴을 맞아 마흔 바늘 정도 꿰맨 적이 있었다. 칼이 목의 경동맥을 끊었으면 죽을 뻔했다. 재벌 집은 돈으로 상황을 무마시켰다. 그걸 보면서 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배웠다. 법대를 지망하게 된 계기가 됐고 고시공부의 원동력이 됐다.

후일 저널리스트 겸 변호사가 되어 청부살인을 한 준재벌급의 범죄 은폐를 과감하게 파헤친 힘이 되어 주었다. 돈으로 살인을 덮으려는 그들이 싫었다. 정의감도 있었지만 과거의 상처와 분노는 그들과 싸우는 동력이었다. 상처의 폭발력을 유용하게 썼다고 생각한다.

40대 중반 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앞두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지난 삶을 한번 정리해 보았다. 이기주의자였고 목표지상주의가 내면에 숨어 있었다. 나만을 위하던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게 된다는 걸 알았다. 떠난 뒤의 모습이 별로 좋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남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고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한 후회가 들었다. 세상적 기준의 삶만 따라갔지 내 자신에게 좀더 솔직한 삶을 살려는 용기가 없었던 걸 깨달았다. 무엇이 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없었다. 수술실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린 십자가 같은 수술대에 팔과 다리를 묶고 눕혀졌다. 형광등이 서늘한 푸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락음악이 요란한 수술실은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 느낌이었다. 의사들이 떠들고 있었다.

나는 저승길로 가는 슬픈 길목이지만 그들에게는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일상인 것 같았다. 내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없어져도 되는 외곽의 떠돌이 별인 걸 알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는 건 귀중한 발견이었다. 수술을 한 이후로는 일이나 돈에 대한 욕심보다는 노는 데 더 비중을 두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작나무와 소나무가 있는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히말라야 계곡을 굽이굽이 돌면서 노란 유채꽃밭과 맑은 시냇물들을 보았다. 배를 타고 세계의 바다를 흘렀다. 지폐 한장을 얻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좋은 책 한 장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암이 삶의 궤도를 바꾸어 준 것이다.

50대 중반 티벳 여행을 하고 돌아와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수술 부작용으로 재수술을 했다. 1000명 중 한 명도 발생하기 힘들다는 그 불행의 확률에 내가 걸려들었다. 깨달음이 결제 아니고 그냥 일어나는 사실들을 ‘받아들임’이라는 걸 알았다. 나머지 한쪽 눈이 존재함에 감사하고 오기로 더 글을 쓰고 책을 읽게 됐다.

나이 60이 되는 해 성경 속에 있는 광야를 직접 가보고 싶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머물던 미디안광야의 베두인 텐트에서 묵었다. 모세가 죽은 느보산에서 1인 텐트를 치고 여리고의 불빛을 멀리 내려다보기도 했다. 돌과 흙만 있는 모압광야에서 밤을 지새고 예수가 40일간 기도하던 메마른 유대광야도 걸었다.

성경을 볼 때 내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그곳에 독충이 있다는 기록이었다. 내가 그 독충에 물렸다. 독충이 팔목과 다리를 파먹어 들어갔다. 국내의 의사들은 중동지방의 독충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치료할 수 없다고 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야에 나간다는 것이 종교적 교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순례길은 당연히 죽음을 생각해야 했다. 나의 허영심과 경솔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는 걸 안타까워 하는 선배들의 표정을 읽었다.

나는 골방에서 겁먹고 울었다. 그냥 더 살고 싶었다. 따뜻한 욕탕물에 들어가 몸을 씻을 수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50대 중풍에 걸려 마비가 된 아버지는 올림픽을 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내게 말했다. 올림픽을 보고 60대 초에 저세상으로 간 아버지는 마지막 병상에서 고희까지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인간은 그런가 보다. 우연히 좋은 의사를 만나 나는 치료를 받고 다시 살기 시작했다. 해외에 봉사를 나갔다가 나 같이 독충에 물린 사람을 치료해 본 경험이 있다는 늙은 의사였다. 그럭저럭 칠십 고개를 넘었다. 조용한 바닷가에서 요즈음 나는 내 자신이 좀더 행복해 지려고 박차를 가한다.

좀더 솔직해지고 싶다.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나의 생각과 감정에 좀더 정직해지고 싶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짜 죽음에 임할 때 아무것도 후회할 게 없었으면 좋겠다. 삶의 고비들은 나를 초원으로 모는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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