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구분법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을까? 감옥에 들어갔던 한 소설가의 이런 얘기가 떠오른다.
“같은 감방에 폭력범이 있었는데 얼마나 거친 지 몰라요. 그런데 이 사람이 감방의 복도를 가다가 마주 오는 배고픈 신입을 봤어요. 그가 주머니에서 마른 빵을 꺼내더니 그 신입의 입에 넣어주면서 ‘쳐먹어 새꺄’ 하고 가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나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에 대해 다시 생각했어요.”
또 다른 감옥에 있던 팔순의 노인한테서 이런 말을 듣기도 했다. “내 옆방에 사형수가 있었어요. 내가 아프다는 걸 알고 사과를 보냈는데 어떻게나 곱게 잘 잘라 보냈는지 몰라요. 그 안에는 플라스틱 칼밖에 없는데.”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란 닥친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설정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좋은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두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그 사람의 작은 행동이다. 실버타운의 공동목욕탕 안에서 본 광경이다. 한 노인이 목욕을 마친 후 샤워기로 자기가 앉았던 플라스틱 의자에 물을 뿌리면서 꼼꼼히 닦았다. 샤워기에 묻은 거품도 씻고 목욕 타올도 비눗기가 없이 물에 빨았다. 그리고는 앉았던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그 의자들이 쌓여있는 위에 포개놓고 때수건도 그것들을 수거하는 통에 놓고 가는 모습이었다. 그 노인의 작은 행동이 좋은사람인 걸 알려주는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인 걸 알려주는 작은 행동들이 많다. 문을 열 때 뒷 사람이 오는지 뒤돌아 보고 문을 잡고 있는 것. 식당에서 일어설 때 의자를 원래의 제자리에 밀어넣는 것, 맨날 보던 노인이 식당에서 보이지 않을 때 그 방을 한번 찾아가 봐주는 것, 생일이나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없는 돈을 털어 다른 노인들과 떡이나 과일을 나누는 것, 텃밭에서 지은 농작물을 주변에 나누는 것, 그런 작은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좋은 사람이 분명한 것 같다.
삶의 심오한 가치가 작은 행동들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나는 몸에 작은 두드러기가 나서 가려웠다. 알러지증상이었다. 실버타운에서 밥을 먹을 때 옆자리에 있는 70대 중반의 임기장에게 그 말을 했더니 “내가 피부약이 많은데 가져다 줄께요” 했다. 그는 얼른 숙소에 가서 연고제 하나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30년간 대한항공에서 여객기를 조종했던 사람이다. 그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내가 월남전 때 헬기 조종사를 했어요. 매일같이 헬기에 뭔지 모를 흰 가루를 싣고 가서 뿌리래요. 그걸 뿌리면 땅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눈같이 내리는 그 가루를 신나게 받는 거야. 밀가루 같은 거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고엽제였어요. 맨날 그걸 취급한 나도 고엽제 환자가 됐지 뭐야. 지금도 각종 연고제를 받아다 쓰고 있어요.”
다음날 실버타운의 목욕탕에서였다. 몸을 씻고 나오는데 때를 밀어주는 영감이 내 몸에 난 두드러기를 보더니 말했다.
“이거는 이 지역의 꽃가루 때문에 생기는 알러지같아요. 나한테 연고제가 있는데 드릴까요? 아니 발라드릴께요.”
그는 구석에 가더니 하얀튜브를 하나 가져와 약을 짜서 내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약을 묻혀 팔과 가슴 그리고 등에 난 두드러기에 발랐다. 그의 손길에서 피의 흐름 같은 따뜻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모두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내가 가진 좋은 사람 구분법의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눈과 귀가 어디를 향해 있느냐이다.
예를 들어 내가 꽃의 아름다움에 대해 글을 썼다고 치자. 어떤 사람은 그 꽃의 아름다움을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다. 반면 그 꽃의 뿌리에 더러운 흙이 묻어 있다는 걸 꼬집으면서 논박하는 사람이 있다. 꽃의 아름다움을 보면 되지 굳이 그걸 뽑아서 뿌리의 흙을 드러내야 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의 내면은 따뜻해 보이지 않는다.
좋은 사람은 좋은 면만 본다. 좋은 소리를 듣고 전한다. 나쁜 사람은 나쁜 면만을 본다. 나쁜 말 듣기를 좋아하고 그걸 전한다. 나는 담론을 얘기하는 사람에게 별로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거창한 구호를 내밀고 선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에 먼지를 내고 진흙을 뿌리는 경우가 많다. 내 나름대로 좋은 사람 구분법에 대해 생각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