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남은 여생 어떤 선택…’하던 일’ 또는 ‘즐거운 일’?

“사무실 문을 닫고 동해 바닷가의 실버타운으로 들어와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면서 나를 찾아간다. 하얗게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밭을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명상을 한다. 그렇게 빈둥거리면서 나머지 인생 여백에 나의 색깔을 칠해도 되지 않을까.”(본문 가운데)

1년 넘게 실버타운에 있으니까 노인들의 살아가는 여러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해가 어스름하게 질 무렵 실버타운의 마당을 산책할 때였다. 그곳에 주차해 있는 카니발의 앞에서 전직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차문을 열고 앞에 있는 남자에게 뭔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가 앞에 있는 남자를 내게 소개하며 말했다.

“후배 교장인데 정년퇴직에 대비해서 여기 실버타운 체험을 왔습니다. 제가 캠핑카로 개조한 카니발을 보여주고 있던 참입니다.”

재미있게 사는 전직 교장 부부였다. 카니발을 캠핑카로 개조해 놀러 다니고 있었다. 실버타운을 주거지로 삼고 있어도 막상 한 달에 묵는 날은 며칠 되지 않는 것 같다. 평생 아이들을 가르쳐온 그 부부는 이제 평생동안 하던 일보다 즐거운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 부부는 실버타운에 묵을 때면 밭에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다.

실버타운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옆자리에 있는 교수 출신 부부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로비의 의자에 앉아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미국으로 유학 갔던 부부가 학위를 따고 미국대학에서 교수로 평생 강의를 하다가 노년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간호학과 교수였던 부인이 말했다.

“미국대학의 교수로 아직 프로젝트들이 남아 있어 고심을 하던 중에 유튜브방송에서 동해 바닷가의 실버타운 광경을 보고 체험을 하러 왔어요. 사람들이 은퇴하고 여유롭게 지내고 있더라구요. 나는 평생을 쫓기면서 골머리를 썩고 살아왔는데 이게 뭔가 하고 내 모습이 보였어요. 재정 전문가에게 물어봤더니 애도 없는 우리 부부가 여생을 살기에 돈은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나이 80이 되는 남편도 젊어서부터 그 나이까지 전공인 약학만 연구했는데 이제는 죽기 전에 인생의 여백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접고 왔어요. 미국 동네 사람한테 집안의 살림을 필요한 대로 가져가라고 하고 실버타운으로 온 거예요. 빈둥거리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면서 살기로 했어요. 때로는 쉬고 놀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모르고 평생 바쁘게 살아온 거죠. 뭘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어요.”

그 부부의 말이 내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인 것 같았다.

서초동에 가면 80대의 노인 변호사들이 아직도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고등법원장을 했던 80대 변호사는 아침이 되면 적막한 법률사무소에 출근해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다가 저녁이면 돌아가는 걸 봤다. 찾아오는 의뢰인도 없는 것 같다.

검사장을 지낸 변호사가 90살 넘어까지 법률사무실을 하는 걸 봤다. 한 사건을 놓고 젊던 나와 경쟁을 벌인 적이 있다. 늙고 귀가 먹은 그는 재판장의 말을 제대로 듣고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맡았던 사건의 변론이 내게로 왔다. 나이가 들면 과거 경력이 화려해도 젊은 변호사보다 에너지도 실력도 뒤쳐지게 마련이다. 며칠 전 대법관과 교수를 지낸 군대 동기가 변호사 개업을 했다고 알려왔다. 그 역시 하던 일을 하지 않으면 공허가 다가와서 그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일찍 은퇴를 한 방송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나이가 들면 평생 하던 일보다 내가 즐거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방송국에서 피디생활을 해왔는데 그걸 잘 한다고 그 일을 계속한다고 해보세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서서히 마음이 위축되고 일할 기회도 줄어들 겁니다. 실력 있고 에너지가 왕성한 후배들이 커올라오니까요. 제 생각에는 하던 일보다는 내가 즐거운 일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의 소소한 즐거움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 친구가 하던 업을 제쳐두고 10여년 전부터 오카리나라는 악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연주실력이 수준에 오르자 몇 명의 동호인들과 악단을 만들어 노숙자의 거리에서 그리고 시골 장마당에서 버스킹 연주를 하고 다닌다. 그는 지금의 삶이 가장 편하고 즐거운 것 같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다.

나 역시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고 동해 바닷가의 실버타운으로 들어와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면서 나를 찾아간다. 하얗게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밭을 산책하고 음악을 듣고 명상을 한다. 그렇게 빈둥거리면서 나머지 인생 여백에 나의 색깔을 칠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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