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나이 들수록 품위 있는 노인들

“죽고 나면 하늘로 올라간 영이 자기가 살아온 날을 되돌아 보면서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사항이 있다고 한다. 그때 좀 더 베풀걸, 좀 더 사랑할 걸,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없었는데 하고 후회한다고 한다. 쿰쿰한 노인 냄새가 아니고 인간다운 향기를 뿜으면서 품위 있게 늙어갔으면 좋겠다.”

실버타운에 1년을 묵으면서 품위 있는 노인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대체로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중요하다고 느낀 게 있다.

1년을 묵으면서 매일 같이 공동식당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밥을 먹는 노인이 있다. 매번 내가 해도 인사를 받는지 아닌지 구별 못할 정도로 무덤덤한 노인이다. 남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늙어서 그런지 표정이 없다. 어떤 때는 화가 나 있어 보이기도 했다. 마음이 나쁘거나 냉정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젊어서부터 인사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옷도 항상 초라하게 입었다.

반면 식당 구석에서 조용히 식사를 하는 90대의 노인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항상 깨끗한 개량 한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공동식당으로 온다. 거의 말이 없지만 항상 미소를 짓는 온화한 얼굴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목례로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이따금씩 함께 생활하는 다른 노인들에게 떡이나 과일을 베푼다. 6.25전쟁 때 국군장교로 참전해 의장대장을 했다는 분이다. 그 이후의 사회경력도 상당하다는 소문이지만 베일에 싸여있다. 잘난 척 안 하는 철저한 겸손의 결과로 보였다. 그 노인에게서는 은은한 멋이 풍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또 다른 90대의 노인이 있다. 그는 동창 중에 가장 늦게까지 혼자 살아남은 것 같다고 했다. 동창회에 전화를 걸어보니까 생존한 동기가 한 사람도 없더라고 했다. 물론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주렁주렁 줄을 매달고 생명이 붙어있는 친구가 있을 수는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건 산 게 아니라고 했다. 그는 매일 기적을 맞이한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속으로 아름다운 세상이 들어온다고 했다. 마음대로 걸으면서 바닷가를 산책할 수 있는 게 기적이라고 했다. 실버타운에서 주는 밥도, 소박한 나물 반찬도 맛이 있다고 했다. 모든 게 감사하다고 했다. 그 노인은 젊어서의 험한 고생 끝에 노년이 왔다고 했다. 쉴 수 있는 노년에 감사하다고 했다.

늙으면서 부서지는 과정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면 인생의 귀한 보석을 얻은 건 아닐까.

실버타운에 80대 말의 노 의사가 있었다. 그는 1주일에 이틀 정도 시간을 내어 다른 노인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었다. 젊어서 많은 사회적 혜택을 받은 걸 생각하면 늙어서 봉사는 당연한 되갚음이라는 것이다.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전문성을 살리지 않더라도 봉사하는 노인들이 있다.

실버타운의 주변에는 밭이 많이 있다. 실버타운 직원들이 직접 옥수수, 상추, 고추 등과 각종 나물을 키워 공동식당의 식자재로 사용하고 있다. 외부에서 구입하면 그만큼 비용이 증가된다는 것이다. 그들만 일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교장 선생님 출신이 뙤약볕 아래서 실버타운 밭의 잡초를 뽑고 있었다. 항공기 기장출신의 노인이 고추와 상추를 키우고 그걸 실버타운뿐 아니라 근처 식당에 나누어 주기도 한다. 봉사하는 모습이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봉사하는 노인도 있다.

엊그저께 80대의 노인 한 분이 나보고 같은 실버타운에 있는 외토리 노인에게 맛있는 걸 한끼 대접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순간 그 노인에게서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그가 위로하려고 하는 사람은 왕따 비슷하게 되어 버린 노인이었다. 남을 눈 아래로 보고 자기중심적이고 물질에 너무 집착해서 사람들이 멀리하는 것 같았다. 밥을 사려고 하는 노인도 왕따노인의 감정적 피해자 중의 하나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왕따에 침묵으로 동조하지 않고 외토리가 된 노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더 강한 것 같았다.

노인들도 나를 중심으로 놓는 사람과 우리를 중심에 놓는 두 부류가 있는 것 같다. 경쟁이 심하던 젊은 날은 이기주의 경향에 흐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의 항해가 끝나고 노년의 포구에 가까이 온 이제는 이웃도 중심에 놓는 타원형의 인격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죽고 나면 하늘로 올라간 영이 자기가 살아온 날을 되돌아 보면서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사항이 있다고 한다. 그때 좀 더 베풀걸, 좀 더 사랑할 걸, 그렇게 심각할 필요가 없었는데 하고 후회한다고 한다. 쿰쿰한 노인 냄새가 아니고 인간다운 향기를 뿜으면서 품위 있게 늙어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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