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수필집 낸 지리산 도사

“그를 보면 조선의 선비 정창해가 떠오르기도 한다. 정창해는 청나귀 위에 이불을 싣고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던 선비다. 역사의 페이지를 들추면 그런 인물들이 또 하나의 인간군을 이루는 것 같기도 하다. 김시습도 끝없이 전국을 유랑하면서 시 2천편과 소설을 남겼다. 나는 그런 인물들에 호감을 느끼는 편이다.”(본문 가운데) <사진 구영회 전 문화방송 기자>

며칠 전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창밖으로 납빛의 바다가 누워 있고 그 위에 회색구름이 정지해 있다. 카톡을 열어보니까 그가 지난밤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서 잤다는 글이 떠올랐다. 그는 차에 슬리핑백 등 필요한 물품을 싣고 끊임없이 전국의 길을 돌았다. 역마살이 낀 사람 같았다. 지난해도 이맘쯤 비가 쏟아지는 날 나를 만난 후 바닷가에서 차박을 하고 갔었다.

방송기자 출신인 그는 정년퇴직을 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10여년을 혼자 살면서 참선을 하고 수필을 쓰는 사람이다. 그는 남에게 자기가 사는 집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수필을 보면 그가 아궁이 앞에서 군불 때는 모습도 보이고 툇마루에 쌓인 낙엽을 치우는 장면도 나온다. 그곳은 아직도 재래식 똥통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혼자 참선을 하고 불경을 공부하다가 승려들이 운수행각을 하듯 세상을 흐르기도 하는 것 같다. 움막도 되고 나귀 역할도 하는 그의 낡은 자동차를 몰고 끝없이 세상 길을 돈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는 것 같다. 바람따라 구름따라 흐르고 밤이 되면 바닷가 주차장이나 산속 오솔길 옆에 차를 세워두고 그 안에서 잔다.

그를 보면 조선의 선비 정창해가 떠오르기도 한다. 정창해는 청나귀 위에 이불을 싣고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던 선비다. 역사의 페이지를 들추면 그런 인물들이 또 하나의 인간군을 이루는 것 같기도 하다. 김시습도 끝없이 전국을 유랑하면서 시 2천편과 소설을 남겼다. 나는 그런 인물들에 호감을 느끼는 편이다. 그는 자신을 지리산 수필가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방송사 사장 출신이라는 말보다 지리산 수필가로 불려지는 게 더 좋은 모양이다.

우리는 묵호의 허름한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물회를 시키고 얘기를 주고 받는 번개팅을 했다.

“우리는 뒤늦게 만났지만 결이 맞는 것 같아서 찾아왔소”

그는 독특한 외모가 됐다. 턱에 하얗게 수염이 자라 있었고 볼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의 글을 통해 보면 차를 몰고 마을로 내려와 붕어빵 두 개와 어묵 한 꼬치로 끼니를 대충 때우는 때도 많은 것 같았다. 내가 걱정이 되어 말했다.

“도(道)를 닦는 것도 좋지만 굳이 똥통이 남아 있는 산골의 그런데서 수행을 해야겠소? 칠십 고개를 같이 넘는 텃수에 잠도 굳이 좁은 차 안에서 자고 말이요.”

옛 선비들의 ‘풍찬노숙’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어울렸다.

“노 프라블럼”

그의 대답이었다. 이왕 만났으니 도를 닦는 그의 말씀을 한마디 들어보고 싶어 물었다.

“글을 보면 가끔가다 ‘내 안의 그놈’이라고 하던데 굳이 그놈이라고 해야겠소? 그분이라고 높여 모셔야 하는 거 아니요?”

그는 오랫동안 전해지는 불교식 용어를 그대로 인용하는 것 같았다. 정신세계의 책에서 나오는 진아(眞我) 또는 ‘참나’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실체를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면의 깊은 심연, 자아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존재 그 분을 나는 성령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는 나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수행한 내용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 안에 근심 걱정을 하고 탐욕스런 내가 펄펄 뛰고 있었어. 참선을 하다 보니까 그놈 뒤 조용한 곳에 펄펄 뛰는 나를 은밀히 지켜 보는 또 다른 내가 있는 거야. 그 놈이 ‘참나’인 것 같았지. 내 안 깊숙이 침잠해 있던 그놈을 보고 진정한 나를 발견했다고 좋아했지. 그런데 요즈음 보니까 속에 펄펄 뛰는 놈과 그걸 지켜보는 두 놈이 결국은 한 놈인 거야.”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파도가 출렁이는 깊은 바다의 심연을 떠올렸다.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연상하기도 했다. 파도가 출렁이는 위도 깊은 심연도 같은 바다고 흐르는 구름이나 뒤에 있는 고요한 하늘도 같은 하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내 안의 그놈이 둘이 아니라면 그 실체는 뭐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찐빵으로 비유한다면 나는 겉껍데기를 뜯어줄 수 있을 뿐이지. 본질인 앙꼬 중의 앙꼬는 묘사가 불가능하지. 이거 누구는 바닷가 방에서 빈둥거리고 앉아있고 누구는 천리 길을 운전해서 그 한마디 알려주려고 이렇게 왔구만.”

“정확히 전하지도 못하는 진리의 본질을 뭣하러 골치 썩이며 공부하쇼? 그냥 대충 살지.”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봤더니 죽고 나서 껍질을 벗어난 의식이 육도윤회를 앞두고 당황하더구만. 갑자기 개로 태어날 수도 있고 아귀가 될 수도 있으니까. 살아있을 때 미리미리 공부를 해두면 그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지.”

그가 생각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인 것 같다. 나는 죽음의 순간 그분이 나타나 내 손을 잡고 안내해 강을 건너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강 건너 나루에는 어머니와 아버지 할아버지가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말이다.

어느새 두 시간이 흘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한두방울씩 뿌리고 있었다. 그가 차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내 속살을 보여드릴까?”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차의 뒤쪽 문을 들어올렸다. 운전석만 빼고 차 안 가득히 그의 살림이 차 있었다. 그 가운데 대나무 돗자리를 깐 작은 잠자리가 보였다.

그가 덧붙였다. “이 자리에 맞도록 하나님이 내 사이즈를 작게 만들어 줬어.”

이 세상의 짐을 내려놓은 후 그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을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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