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노인들의 자기소개서

“세월이 흘러 동기생 대부분이 손주 재롱에 함박웃음을 짓는다고 했다. 잦은 부음 소식이 있고 여덟개 반 졸업생 가운데 한 반 인원이 죽었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직장에서 고위 임원이 되지 못했어도 회사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어도 재벌기업인에 못잖게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고 있다.”(본문 가운데) 

 

지인이 바닷가 마을에 사는 내게 두툼한 책 한 권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자신이 졸업한 남쪽 도시의 고등학교 출신들이 칠십 고개를 넘으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는 자기소개서 같은 문집이라고 할까. 같은 시대를 살아온 나와 같은 나이의 70년의 궤적들이었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공유했을까. 우리는 6.25전쟁의 폐허 속 잿더미에서 솟아 나온 새싹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외국이 불쌍하다고 던져주는 헌 옷을 입고 그들의 동정이 담긴 밀가루로 굶어 죽는 걸 면했다. 4.19와 5.16때는 거리의 함성과 어른들이 불안해하며 쉬쉬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세상물정을 몰랐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사방에 붙어있는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구호를 보았고 월남전 참전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썼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험을 치르고 들어간 세대다. 입시지옥에 시달렸고 어린 나이에 낙방이라는 쓴맛을 보고 울기도 했다. 뜻도 모르는 국민교육헌장을 통째로 외워야 했다.

고3 때 시월유신이란 정치적 격랑을 보고 1970년대 벌어진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80년대는 대부분이 회사의 말단사원으로 땀을 흘렸다. 뜨거운 모래가 열을 뿜어대는 사우디에도 달려갔고 이민가방 가득히 샘플을 넣고 외국의 거리를 걸었다.

90년대는 자라나는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허리가 휘었고 업무 스트레스는 폭탄주를 마시며 노래방 18번 애창곡으로 풀었다. 그러는 사이에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부국으로 서고 우리들이 ‘선진한국’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조금은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깊은 산속의 샘물에서 나와 흐르기 시작한 물방울들이었다. 개울과 계곡을 흘러내려 서로 모여 강이 되어 흐르다가 지금은 바다로 나가기 직전의 해가 저무는 하류를 마지막으로 빙빙 돌고 있는 상태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물방울들이 서로서로 지나온 사연들을 얘기하고 있다.

나는 그 책의 페이지를 들추면서 내 또래의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 보고 있다. 어린 시절 가난을 공통적으로 쓰고 있다. 물을 듬뿍 부어 쑨 멀건 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학교에 가니 부자집 아이의 계란프라이가 얹힌 하얀밥 도시락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혼자 외운 콘사이스 한장 한장을 씹어먹으면서 독하게 공부해 대학입시를 치르고 군대에 끌려가 매일 얻어맞고 각자 사회라는 땅에 씨가 되어 떨어진 얘기도 있다. 가시덤불 가득한 세상을 헤쳐온 얘기들이 흘러나온다. 영업사원으로 가는 곳마다 잡상인 취급을 받고 쫓겨나면서 슬펐다고 했다. 그래도 3년 후 전국의 판매왕이 되어 기뻤다고 한다.

출판사 직원으로 밥을 먹으면서 계속 문학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문학소년도 있었다. 구도자 같은 자세로 글쓰기에 전념하다가 암이라는 초청장을 받고 먼저 저세상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그의 아내가 글로 남편의 친구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인생은 길지가 않다고. 다 금방 끝난다고.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은 행복하시라고.

어떤 사람은 혁명으로 세상을 뒤바꾸려고 하다가 감옥을 여러번 갔다 왔다고 했다. 젊은 날 레닌이나 모택동의 얘기가 그럴싸해 따라갔다고 했다. 자본주의보다 더 낳은 사회가 있다는 그들의 이야기가 조지 오웰이 소설로 써놓았듯 환상이라는 걸 알고 혁명을 포기했다고 쓰고 있다. 혁명보다는 사우디나 창원공단에서 땀을 흘린 동기생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동기생 대부분이 손주 재롱에 함박웃음을 짓는다고 했다. 잦은 부음 소식이 있고 여덟개 반 졸업생 가운데 한 반 인원이 죽었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직장에서 고위 임원이 되지 못했어도 회사 발전에 기여했다고 하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어도 재벌기업인에 못잖게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고 있다.

그들의 얘기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다. 인생이 별 게 아닌 것 같다. 누가 조금 더 올라갔건 돈을 더 많이 벌었건 결국 모두 자연인으로 돌아왔다.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 앞에서 빨리 가고 늦게가고도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우리의 삶이 골목에서 옹기종기 모여 놀이를 하다가 어둑어둑해져 엄마가 부르면 하던 놀이를 그대로 놔두고 집에 와 씻고 자는 아이들 비슷한 건 아닐까.

지구별에 와서 모두들 한세상 잘 놀다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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