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
내가 다니던 중학교 앞 골목에 허름한 중국식당이 있었다. 구수한 기름 냄새가 풍겨오는 주방의 가운데 두툼한 통나무 도마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수북이 썰린 양파가 있었다. 이따금 한가한 시간 구멍뚫린 셔츠를 입은 중국인 주방장이 그 옆 의자에 앉아 담배 한대를 피면서 쉬고 있었다.
중국인 주방장은 자기가 있을 가장 편한 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지도 않고 마음을 다 비운 도인 같다고나 할까. 이상하게 나도 그렇게 주방에서 넓적하고 두툼한 칼을 가지고 야채를 썰어보고 싶었다.
변호사를 정동 근처에 있는 자그마한 회색 5층 빌딩의 꼭대기층에 있는 친구 아버지의 법률사무소에서 시작했다. 평생 변호사의 외길을 걸어온 친구 아버지 사무실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오래된 나무 책장 속에는 누렇게 바랜 손때 묻은 법서들이 꽂혀 있고 낡은 책상 위에서 탁상시계의 초침 소리가 시간의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친구 아버지인 노 변호사는 출근하면 오전에는 그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독서를 했다. 점심 때가 되면 근처의 깨끗하고 아담한 레스트랑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변론서를 쓰거나 잠시 법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자기에게 알맞는 일감을 가진 규칙적이고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나는 그 노 변호사가 가장 아름다운 자기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최근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읽었다. 직장에서 은퇴하고 지리산에서 10년 넘게 혼자 수행하듯 살아가는 작가는 머리 글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삶에서 인생길에서 가장 완벽한 제자리는 어디일까? 괴롭거나 힘겹거나 시달리지 않고 일체의 풍파가 고요히 가라앉아 지극히 평온한 제자리 말이다. 그건 어떤 물리적 장소라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매일 매 순간 맞이하는 시간과 공간 다시 말해 ‘마음속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좋은 화두를 얻은 것 같다. 나는 살아오면서 순간순간 편안함을 느끼는 제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발돋움을 하거나 다리를 넓게 벌리고 불편하게 인생길을 걸어온 것일까. 무라키미 하루키의 글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물이 마른 깊은 우물 속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밀도 짙은 어둠의 바닥에 앉아 있을 때 다가오는 신비한 평안함이다. 짐승들이 굴속에서 느끼는 안정감 비슷한 게 아닐까. 나의 유년시절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장소가 있었다. 공사중인 건물 어두운 지하실의 구석에 숨어 편안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 어둠이 내릴 무렵 학교 근처에 있는 사찰 법당에 들어가 혼자 앉아있곤 했다.
촛불이 은은히 비치는 법당 안에는 은은한 향냄새가 감돌았다. 어떤 영혼이 향기를 타고 시간의 저쪽에서 내게로 다가오는 환영을 느끼기도 했다. 예배당에서도 동질의 유현한 느낌을 받았다. 낮고 은은한 찬송연주가 투명한 물결처럼 주위에 번지고 강대상 위의 촛불 옆에 성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슬같은 성령이 촉촉하게 내 영혼을 적시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평안하고 좋았다.
지금은 바닷가 실버타운 방을 빌려 지내고 있다. 집도 아니고 절도 아니고 내가 나에게로 깊어지는 장소라고나 할까. 글을 쓰고 있는 이 공간이 편안한 나의 자리다.
성경 속 한 인물의 편안한 자리가 떠오른다. 성문 앞에서 일을 하는 남자가 역적을 왕에게 알린 공을 세웠다. 왕은 그에게 화려한 옷을 입히고 말을 타고 백성들 사이를 행진하게 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왕의 호의를 받은 후에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원래의 자기 일자리로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걸 배운 귀절이었다.
나는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인 판사보다 변호사라는 조연이 편했다. 실수해서는 안된다는 주연의 긴장감에 비하면 청바지를 입고 아무 데나 앉을 수 있는 편안함이라고 할까. 일류작가는 못되더라도 변론서라는 종이 위에 한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형상화 하는 것도 괜찮았다. 밥을 얻을 수 있는 수수한 직업,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 평안함을 느끼는 소박한 방 그곳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자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