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내 인생 마지막 살 곳은 이런 곳이었으면…

“나는 죽음 이후 도와줄 상조에 들어두었다. 내가 나를 화장장으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입을 옷을 불에 잘 타는 면으로 만든 위아래가 붙은 헐렁한 옷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예수님 패션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끝까지 살 바닷가의 집을 알아보고 있다. 그렇게 하니까 요즈음은 진짜 산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브라질 한 농촌 마을 오솔길을 두 노인이 걷고 있는 모습.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요즈음 인생의 마지막에 살 곳을 생각하고 있다. 법으로 밥을 먹고 살자니 법원 동네에서 30년을 살았다. 그 세월이 지났는데도 정이 붙지 않았다. 소년시절 기억이 묻어있는 성북동에서 안암천으로 흐르던 개천가 집을 얻어 살까 하다가 포기했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마음에 들어와 있지 현실에는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공동주택을 지어 노년을 함께하는 경우도 괜찮아 보였다. 한적한 바닷가 아파트를 빌려 혼자 생활하는 친구도 있다. 집안 친척 되는 화가는 지리산 자락의 산골마을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 법정스님같이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살다 간 경우도 있다. 나는 요즈음 실버타운에 2년째 묵으면서 마지막까지 살 곳을 궁리하는 중이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어디서 죽을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머리속으로는 바다나 숲속생활의 낭만을 상상하지만 현실에서 뿌리를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평생 다니던 교회 인연이나 친구 관계의 줄을 끊기 어렵다. 그런 인간관계가 삶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익숙해진 환경도 뿌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단단한 흙이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스위스의 산속 마을을 단체로 여행한 적이 있다. 압구정동에 산다는 한 부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여기가 아무리 좋아도 살라고 하면 나는 안 살 거야. 백화점에 가서 쇼핑 하고 모여서 수다도 떨어야 하는데 여기는 뚝뚝 떨어진 집에서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거잖아?”

내가 사는 동해를 찾아왔다가 가는 친구들의 표정을 보면 거의 다 그런 것 같았다. 경치는 좋지만 어떻게 거기서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2년째 살고 있는 동해 바닷가 외진 곳의 실버타운에 대체로 만족한다. 이곳 실버타운을 찾아오는 노인들이 내게 슬며시 묻는 사항이 있다. 앰블런스를 타고 일분일초를 다투며 응급실로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근처의 큰 병원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냥 죽으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인생 칠십 고개를 넘겼으면 그만큼 삶을 확보해 온 것으로 감사하고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무의미한 기나긴 사멸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일까. 침대를 떠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미 사회적 죽음이다. 각종 의료기기에 둘러싸인 채 주렁주렁 줄을 매달고 있는 중환자실은 지옥일 수 있다.

중환자실에서 매일 새벽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검사들을 해야 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 아버지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의 연명치료를 못하게 달라고 아들인 내게 말했다. 나 역시 윙윙거리는 기계음 속에서 차디찬 벽을 보며 죽고 싶지 않다.

실버타운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 다음 단계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이다. 여기 와서 알았다. 요양병원에서는 해골같이 말라도 죽지 못하게 의학적으로 붙잡아둔다는 것이다. 그래야 수입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의 요양원도 인간 이하의 싸구려 물건 취급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비행기의 일등석에 타듯이 돈이 많으면 다를 수도 있다.

나는 나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고 싶다. 그래서 마지막에 살 곳을 생각하고 있다. 그곳은 편하게 죽어갈 수 있는 나의 집의 나의 방 아닐까.

죽음을 직시하고 준비할 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것과 동전의 양면이다. 이제는 암에 걸렸다고 해도 항암치료를 받지 않을 예정이다. 일체의 연명치료를 거절할 생각이다. 몇년 전 한 금융그룹의 회장부부가 농담같이 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부인이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여보 죽은 사람 베옷을 입히는 걸 보고 끔찍했어. 평소에 안 입던 누런 베옷을 입고 베로 만든 버선을 신고 베로 얼굴까지 가리잖아? 난 죽을 때 베옷 안 입을 거야. 평소에 입던 예쁜 명품 원피스 입고 갈 거야.”

“화장장에 가서 금세 다 타 버릴 건데 옷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돈이 아까운데 나는 죽으면 빤스만 입고 화장장으로 가면 어떨까?”

“그렇게 죽어서 저승에 가서 조상님들 봤을 때 회장님이 빤스만 입고 있을라고?”

“그건 좀 그렇구나 그러면 평소에 입던 티셔츠하고 청바지 입고 가면 되겠네.”

내가 그걸 듣고 웃었지만 뼈가 있는 말 같았다.

나는 죽음 이후 도와줄 상조에 들어두었다. 내가 나를 화장장으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입을 옷을 불에 잘 타는 면으로 만든 위아래가 붙은 헐렁한 옷으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예수님 패션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끝까지 살 바닷가의 집을 알아보고 있다. 그렇게 하니까 요즈음은 진짜 산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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