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단역 배우와 앙꼬 빵으로 성공한 두 노인 이야기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공부와 관련된 한 개천만을 보고 그러는 것 같다. 고시제도가 그랬다. 여기저기 개천이 많이 보인다. 연기의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도 있다. 베이커리의 세계에서 용이 나올 수도 있다. 자기 스스로 발견한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자기자신의 꽃을 피워야 한다는 생각이다.”(본문 중에서)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낸 고교 1년 선배가 있었다. 백수가 되어 세월을 보내다 보니 그 참에 연극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은 대학 때부터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돈을 벌어야 하고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다.

그는 동숭동의 연극무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주인공같은 화려한 역할은 없어도 나이먹은 사람이 하는 단역은 있었다. 돈을 받는 일이 아니니까 경쟁도 별로 없었다. 그는 여기저기 연극무대 단역으로 불려 다녔다. 무대 저쪽 관객석 어둠 속에서 수십개의 눈들이 몰입해서 무대 위 자신에게 몰입해 있는 걸 느끼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순간이지만 자기가 맡은 단역에 최선을 다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자 알음알음으로 텔레비젼 드라마에서도 단역을 해보라는 말이 들어왔다. 뒤늦게 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연기 그 자체가 좋았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드라마 속의 지나가는 행인이거나 식당의 주인공 옆자리에서 밥 먹는 손님 역할 같은 것들이었다.

단역을 맡은 다른 사람들은 카메라가 지나가고 나면 금세 긴장을 풀고 다른 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카메라가 지나가도 감정을 풀지 않고 역을 맡은 캐릭터가 되어 있었다. 닫혀 있던 어떤 문이 그의 앞에서 열리는 듯 했다. 고정출연도 되고 베스트극장이라는 프로에서 주인공 역할도 맡게 됐다. 나이 칠십이 넘었어도 이따금씩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연기하는 그를 보곤 한다.

사람마다 꽃을 피울 수 있는 씨가 깊은 내면에 숨어 있는 것 같다. 그게 묻힌 채 그냥 삶이 끝날 수도 있고 뒤늦게 발아해서 활짝 꽃 피우고 향기를 뿜어낼 수도 있다. 인생 후반전에 또 다른 작은 걸 성취한 친구를 봤다.

가난하고 소아마비로 몸도 불편한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사무소에서 도급을 받아 플래카드나 현수막을 만들었다. 그는 백화점을 찾아다니며 일거리를 달라고 사정했다. 간절하게 부탁하고 감사해 하는 그의 겸손한 태도에 대형 백화점이 그에게 일을 몰아주었다. 그는 나름대로 강남에 빌딩을 가질 정도로 돈을 벌었다.

어느 날 그는 해오던 일에 염증이 났다. 언제나 을이 되어 담당임원에게 굽신거리며 뒷돈을 챙겨 주는 일을 더이상 하기 싫었다. 당당하게 자기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는 어려서 작고 예쁜 베이커리를 내고 그 안에서 빵 만드는 일을 꿈꿨다. 그의 로망은 어려서 종로에 있던 고려당이라는 빵집의 단팥빵이었다. 어른들은 그 단팥을 ‘앙꼬’라고 불렀다.

윗대 어른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제과점에서 일하면서 어깨 넘어 앙꼬를 만드는 걸 배웠다. 세월이 가고 세대가 바뀌면서 어렸을 때 먹던 그런 앙꼬 맛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 맛을 되살려내고 싶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앙꼬 장인을 만나 기술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다. 일본의 장인들은 기술전수를 거절했다. 그는 사정사정하고 돈을 주고 일본 내에서는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쓴 후에 마침내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돌아와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예쁜 베이커리를 차렸다. 작고 동그란 멋진 안경을 맞추어 쓰고 예쁜 앞치마를 두르고 그는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밤 열시경이 되면 그는 주방에서 혼자 남아 그만의 앙꼬를 만들었다. 맑은 물에 팥을 삼고 체로 껍질을 거르고 솥에 넣어 은근한 불에 삶았다. 끓는 팥의 옆에 앉아 거품을 거두고 나무주걱으로 저으면서 혼을 집어 넣었다.

그가 완성한 앙꼬는 어려서 먹던 추억의 앙꼬맛 이상이었다. 일본의 앙꼬는 한국인이 먹기는 지나치게 달았다. 그는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가볍지 않고 깊은 맛을 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재료값을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밀가루를 사용하고 최고품질의 국산팥을 구입했다.

그가 만든 모찌와 단팥빵은 그 맛이 세계 최고일 것 같았다. 가격도 높게 책정하지 않았다. 하나씩 팔 때마다 손해가 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좋다고 했다. 자기건물의 귀퉁이에서 하니까 임대료가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자기의 빵을 먹고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면 손해가 나더라도 괜찮다고 했다. 그 정도의 손해는 감당할 정도로 모아놓은 재산이 있다고 했다.

인생 후반전에 엉뚱한 꽃을 피운 두명은 삶의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직업을 갖고 돈을 많이 번 걸 성공이라고들 한다. 세상이 던지는 그런 프레임 속에 갇힐 필요가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자기의 속도로 하면서 돈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게 더 질 높은 성공이 아닐까.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시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공부와 관련된 한 개천만을 보고 그러는 것 같다. 고시제도가 그랬다. 여기저기 개천이 많이 보인다. 연기의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도 있다. 베이커리의 세계에서 용이 나올 수도 있다. 자기 스스로 발견한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자기자신의 꽃을 피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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