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 실버타운서 글 쓰는 변호사 엄상익 “내 작은 얘기가 몇명에라도 도움된다면”

칠순을 앞둔 엄상익 변호사는 가족들과 떨어져 묵호 실버타운서 생활하고 있다. 매일 바닷가를 보며 글을 쓰고 지낸다고 했다. <출처 주간조선>

명문 경기중·고 시절 ‘꼴통’으로 인생1막 열어

[아시아엔=함영준 <마음건강 길> 발행인] 2022년 8월 중순 오후 동해의 바닷바람은 뜨거웠다. 그는 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해변가 카페 2층에 앉아 있었다. 지난 1월 이곳 실버타운에 혼자 내려온 이후 매일 반복되는 일과 중 하나였다.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오전에 쓴 에세이를 다듬고 오후에 쓸 소설 내용을 구상하는 시간이다. 주로 그의 젊은 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인간과 인생, 사건에 얽힌 이야기와 사회에 대한 그의 시각들을 다루고 있다.

“나름 열심히, 그리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과거를 회고하다 보면 부끄럽고 후회되는 일들이 더 많이 떠올라요.… 그래서 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제 작은 이야기가 주위 몇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보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엄상익(69) 변호사와 필자는 30년 넘는 오랜 인연이 있다. 젊은 기자 시절 우연히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에 근무하던 그를 알게 돼 우리는 시국을 논하는 술친구가 됐고, 그를 통해 권부의 중요 정보들을 얻어내기도 했다.

내게 그는 당시 최고 권력기관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시각, 온유한 성품, 겸손한 자세를 갖춘 엘리트 소장 법조인으로 비쳤으며 실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변호사 생활 청산 후 네이버 블로그 글쓰기

그러나 그가 일선 변호사 생활을 청산하고 네이버 블로그 ‘엄변호사의 못다한 이야기’에 매일 올리는 글을 보면서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놀랐다.

그가 학창시절 못 말리는 ‘꼴통’이었으며, 군법무관 시절엔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군수비리를 사단장 면전에서 공개 폭로해 사법처리시킨 ‘강골’이었고, 안기부 시절에는 당시 최고 실세 박철언씨의 사생활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이단아’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지금과 같은 민주사회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 연줄도 없는 ‘얌전한’ 젊은이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왕따되기를 자초하고 그런 일들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뒤에는 요즘처럼 운동권, 노조, 시민단체 등의 든든한 후원세력들도 없었다. 이제 인생 2막을 마치고 3막, 남은 여생을 사는 입장에서 소회를 듣고 싶었다. 그가 사는 동해 묵호 실버타운을 찾아갔다.

“아내는 서울 집에 있으면서 가끔 왔다 가고요, 평소에는 나만 혼자 살아요. 오래전부터 법정스님의 혼자 정갈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여생은 그렇게 자신을 찾고 글 쓰고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실천을 하는 거죠.”

그가 사는 실버타운은 동해바다를 끼고 위로는 설악산, 속초, 양양, 아래로는 삼척, 울진까지 대략 차로 1시간에 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방 2개와 거실, 화장실 2개, 주방이 있는 41평형에 살고 있는데 보증금 2억5000만원에 월 130만원이다. 부대시설로 천연온천탕에 야외수영장, 헬스장, 극장, PC장, 마사지실 등이 구비돼 있다.

“식당 음식도 좋고 주변 경관도 좋아 살기가 참 편합니다.”

나는 2박3일간 그의 실버타운에서 함께 머물면서 동해 바닷가를 산책하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또 맛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별로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1967년 당시 최고 명문인 경기중학에 입학했다.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과 고관대작·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귀족학교에서 그는 누구보다 심하게 방황했다.

수시로 친구들과 싸우고 선생님에게 대들었으며 성적은 바닥이었다. 심지어 ‘꼴등 해보기’를 목표로 구체적으로 ‘교과서 안 가져가기’ ‘수업 중 노트 안 하기’ ‘선생님 강의 안 듣기’ 등의 실천계획을 세워 실행하기도 했다.

지금은 정독도서관으로 바뀐 서울 종로구 화동 1번지 구 경기고 본관건물. 1969년 중학교, 1977년 고교 평준화 조치가 시행되기 전까지 경기중-고교는 우리나라 최고 명문학교였다.


“모난 성격, 열등감, 변두리적 자의식, 오기 등의 발로였죠”

중학 2년 어느 날 숙직실 후미진 곳에서 담임교사로부터 죽도록 얻어맞았다. 명분상 불량학생 훈육이었지만 진짜 맞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학교에선 교사들이 사전에 시험문제를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일들이 간혹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된 엄상익은 담임을 찾아가 “문제지 유출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엄상익은 학교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 됐다. 어찌 보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학교 안팎에서 수시로 싸움을 벌였다.

당시 경기중 내에도 돈을 내고 뒷문으로 들어오는 ‘보결’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독불장군’ 엄상익은 그들과도 자주 싸움을 벌였다.

중3 어느 날 대기업 회장 아들이 뒤에서 일방적으로 칼로 공격해 중상을 입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회장 아들이 가해자고 엄상익은 피해자인 사건인데 학교에서 쌍방과실로 인정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정학을 내렸다.

회장 사모님의 금품공세 로비 덕분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엄상익은 이 사실을 당시 로비를 받은 교사 2명으로부터 직접 들었다. 일종의 ‘양심고백’이었다.

“상익아. 내가 교육자로서 해야 될 일이 아닌데 그렇게 했다.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사건 이후 교내에서 엄상익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후에도 전혀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자퇴의사를 밝혔으나 선생님들이 만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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