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나의 ‘온정’은 위선이었을까?

멕시코의 산타마르타 교도소 여성 재소자들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기억의 깊은 우물 속에 있던 것들이 뜬금없이 내 마음속으로 쳐들어오는 때가 있다.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대도라고 불리던 늙은 절도범이 내게 말했던 그의 어린 시절 한 삽화였다. 추운 겨울날 꼬마였던 그는 동네 골목 구석에서 가마니 속에 들어가 잔 적이 있다고 했다.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러 온 동네 아줌마들이 오줌까지 싸서 김이 피어오르는 가마니 속에 들어있는 그를 보고 안타까워 혀를 찼다고 했다. 그는 배가 고프면 깡통을 들고 구걸을 했다고 했다.

그가 열서너 살 무렵 그를 사랑해 주던 지게꾼 할아버지가 있었다고 했다. 그 지게꾼 할아버지를 우연히 마주칠 때 마치 자기 손자를 보듯 눈빛이 그렇게 따뜻하더라고 했다. 어쩌다 길가에 앉아 지게를 놓고 쉬는 그 할아버지를 보면 푸근하고 그냥 좋았다고 했다. 그 할아버지는 그가 좋지 않은 짓을 하면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렇게 하면 못쓴다고 달랬다고 했다. 그에게서 들은 작은 사랑의 기억이었다. 아이일 때 받은 사랑 한 모금은 평생 동안 기억에 남는지도 모른다.

내가 열살 전후쯤이었던 것 같다. 방학이면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있는 할머니의 초가집에서 있곤 했다. 그 시절 여름이면 젊은 전도사들이 시골의 작은 예배당에서 마을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런 전도사가 헤어질 무렵 나를 꼭 안아주었던 따뜻한 사랑의 기억이 칠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나의 영혼 속에 남아있다.

이웃과 작은 사랑을 나누는 게 윤기 있게 사는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남을 향한 작은 미소도 목말라하는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을 주는 것도 사랑이다. 변호사를 하다 보면 도와달라는 구조신호를 받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불쌍한 영혼을 가진 열네 살의 소년이 내 마음의 창가에 다가와서 살려달라고 날개를 푸드덕거린다.

간접적으로 얘기를 들었다. 열네 살의 소년이 감옥에 있다. 주차장에 있는 문이 잠기지 않은 차를 몰고 다니다 버리고 도망갔다. 차 안에 동전이나 작은 돈이 있으면 그걸 가지고 가서 게임을 했다. 거기에 재미를 들여 수십 번 그 짓을 하다가 걸린 것 같다. 막 일을 하는 아버지와 베트남 출신의 엄마를 가진 아이였다. 그 아이의 회색빛 인생이 대충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 철이 없는 그 아이가 삶의 시궁창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사람을 돕다가 실패한 적이 많다. 재심을 해서 대도라고 불리던 상습절도범을 석방시켰을 때 너무 주관적이고 감상적이었다. 세상은 자기식대로 온정이라고 하면서 물질을 베풀고 그를 우상화했다. 나는 그의 본질을 보려고 하지 않고 낭만적으로 설정한 그를 만들었다. 그는 철저히 추락했고 나는 거짓말쟁이 위선자가 됐다.

지난해에도 또 다른 실패를 맛보았다. 감옥에 있던 살인범이 있었다. 오랜 세월 면회 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주위에 흉기로 인식될 정도로 난폭한 인물이었다. 대개 사랑할 줄도,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고 큰 사람들이 그랬다. 그가 내게 도와달라고 편지를 보냈었다. 자기가 아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절실하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그에게 성경 속 시편 23장을 천번 공책에 써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래야 도울 수 있다고 했다. 그건 내가 배운 기도의 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의 영혼이 구원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가 공책에 그걸 다 써서 보냈다. 나는 그가 자신의 모습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석방이 됐다. 그는 계속 나에게 의지하는 것 같았다.

나는 감상적으로, 내 생각으로 돕지 않기로 했다. 그런 사람들의 비틀린 영혼을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방을 얻어주고 생활비를 주기를 원했다. 거지근성이었다. 나는 그가 노숙자가 되더라도 그 영혼이 살아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도, 없으면 노숙자가 되는 데 그는 왜 아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단호하게 그의 요구를 거절하니까 그는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화장터에서 그를 태우면서 씁쓸한 마음이었다. 돕는다고 하면서 또 실패했다. 영혼도 ‘그분’이 관여하지 않고는 고쳐지지 않는 걸 알았다.

열네 살짜리 아이가 다시 나의 마음창가에서 도와달라고 날갯짓을 하고 있다. 도와야 할지 말지 어떻게 돕는 게 좋을지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다 오늘 아침 문득 마음으로 쳐들어온 광경이 대도라는 상습절도범을 무료변호할 때 그에게서 들은 삽화 한 장면이었다.

거지아이였던 그를 따뜻하게 품은 지게꾼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어오는 건 하나의 계시일까? 열네 살 아이의 할아버지가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내 판단 내 생각으로는 일하지 않기로 했다. 그 분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면 시키는 데까지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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