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국가·사회의 문제해결은 정의가 핵심···정의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

미국 로키산맥에 있는 큰바위 얼굴.

[아시아엔=엄상익 변호사, 대한변협 대변인 역임] 얼마 전 김영삼 대통령의 민정수석비서관을 했던 분을 만나 저녁을 함께 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오랫동안 정치적 역경을 함께 넘어 온 동지가 있었어. 그런데 그 사람이 물의를 일으킨 거야. 힘들게 살아왔으니 돈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었던 거지. 아무래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끈끈한 정이 앞 설 것이라고 봤어. 그래서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들어가서 눈치를 살피면서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안도 말했지. 대통령의 표정이 의외로 냉랭하더라구. 그러면서 나보고 원칙대로 처리하라고 지시하시는 거야. 섬뜩한 느낌까지 받았어. 그런 대통령 태도를 보면서 나도 조금만 실수하면 인정사정없이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어.”

김영삼 대통령은 정의를 가장 우선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많은 경우 엄숙한 정의의 길은 몰인정해 보인다. 사람들은 다른 것은 용서해도 인정머리 없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 입장에서 정의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여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정실이나 이익의 위에 있어야 했다. 설사 그 길을 가는데 십자가를 통과한다고 해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최측근 참모를 지냈던 분을 만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통령선거의 가장 중요한 무기는 돈이었다. 측근 몇 명이 정치자금을 현찰로 받아 방에 쌓아두었다. 어느날 그 자금을 트럭에 실어 옮기다가 적발되어 큰 물의가 일어났다. 돈을 옮기던 모 변호사가 구속됐다. 핵심참모였던 모 변호사는 수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회창 대통령후보는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고 하면서 벌을 받겠다고 했다. 수사를 받던 핵심참모인 모 변호사는 “아무것도 모르시면서”라고 하면서 말렸다. 밑에서 정치자금을 모았지 이회창 대통령후보는 정작 아무것도 모른 게 사실이었다고 한다. 그 변호사는 그에게 선고된 징역형을 당당하게 다 살고 나왔다. 대통령 후보나 핵심참모 사이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의리 내지 도리 같은 게 보였다. 정의인 법 앞에서 의리와 도리는 고개를 숙였지만 그들의 모습은 괜찮아 보였다.

선거전이 치열할 때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장인이 공산당이라는 문제가 불거졌다. 반공이 이념화된 우리사회에서 그것은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그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후보는 연설장에서 이렇게 맞받아쳤다.

“장인이 공산당을 했다고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평생 같이 살아온 집사람을 버리란 말입니까? 이혼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노무현 대통령후보는 인정에 호소했다. 그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후보는 덫에서 벗어났다. 우리나라 사람을 끄는 제일 큰 힘은 정이었다. 도리로 설득되지 않고 정의관념에 어긋나도 정에 호소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금세 녹아내렸다.

아버지 엄마가 총에 맞아 죽은 박근혜 대통령후보에 대한 지지자의 정은 절대적이었다. “에구 불쌍한 것”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게 끝나는 상황이기도 했다. 사람을 끄는데 제일 큰 힘은 정인 것 같다. 의리나 도리로 설득되지 않고 정의로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정으로 하면 쉽게 변한다.

정은 인생의 꽃이고 열매다. 생명 그 자체다. 아름답고 따뜻한 정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포근한 가정과 나라를 만든다. 그러나 인생이나 사회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순서가 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그 첫째가 정의다. 둘째가 도리다. 그리고 마지막이 정이라는 생각이다. 옳은가 옳지 않은가가 핵심이다. 옳다면 모두가 반대해도 그 길을 가야 한다. 옳지 않다면 가지 말아야 한다. 한 재벌그룹 회장이 구속된 동생의 변호사로 나를 선임했다. 이상했다. 그 재벌그룹에 소속된 변호사가 200명 가량 있었기 때문이다. 전관예우를 고려했다면 그 중에 법원 고위직을 역임한 변호사도 여러명이었다.

내가 선택된 이유는 간단했다. 담당 재판장과 어려서부터 가장 친한 친구라는 이유였다.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와 나는 깊은 정이 있었다. 재판장인 친구는 내가 그 사건을 맡은 자체로 괴로워 할 게 틀림없었다. 정 때문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친구로서의 도리를 생각했다.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을 맡는 건 우정을 비즈니스의 도구로 변질시키는 짓이었다. 친구라면 우정을 상품으로 팔지 않는 게 도리라는 생각이었다. 제일 중요한 건 정의였다. 정의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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