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좋은 기자들

프레스센터에 있는 이우환 작가의 관계항(Relatum). 기자는 과겨-현재-미래라는 시간과 동서남북의 공간을 연결하며 기사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직업군이다. 중앙아시아 기자들 사이엔 이런 속담이 전해진다. “우리는 한줄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사흘 밤낮을 걷고 또 걷는다.”

친한 대학 선배가 있다. 일류신문사의 기자를 하다가 데스크를 보게 되고 정부로 들어가 고위직에 있다가 퇴직했다. 그분이 과거를 회고하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 내 밑에 작가로 유명하게 된 김훈과 신문사 주필이 된 임철순이 기자로 있었어. 후배 기자들이지만 둘 다 아주 우수했지. 그때 원고지 두장 분량의 작은 고정기사를 내보내는 난이 있었지. 그걸 후배 기자 두 사람에게 교대로 원고를 쓰라고 맡겼어. 매일 두 사람이 순차로 내게 기사를 써 올리는데 그 원고를 보면 데스크인 내가 기가 죽었어. 할 일이 없는거야. 내가 그 글을 보고 고치면서 지도해야 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내가 실력이 밀리는 거야. 김훈의 노력이 대단했어. 그 두장의 원고를 쓰기 위해 주위에 수십장의 파지가 있는 거야. 나는 노력도 따라가지 못하고 명색이 부장이라고 하면서 글도 못 쓰고 열등감을 느꼈지. 내가 신문사를 그만두게 된 원인 중에는 뛰어난 그 두 후배 기자들의 존재도 있었어.”

그런 말을 솔직히 뱉어내는 대학 선배의 말이 잔잔한 감동으로 나에게 여울져 왔다. 그 역시 소박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좋은 신문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다. 고교 동기 중에 기자가 된 친구가 있다. 작은 덩치에 하얀 얼굴을 한 그 친구는 얼핏 보기에는 연약해 보였다.

그런데 내면은 그게 아니었다. 사병으로 군 생활을 했던 그는 100km 행군에서 부상을 입었는데도 일등으로 끝까지 달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내게 얘기하면서 행군을 끝내고 군화를 벗어보니까 발바닥이 뭉개져 양말과 섞여 있더라고 말했다. 그가 병아리 경제 기자를 할 때였다. 하루는 내게 이런 말로 자기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취재를 하기 위해 경제관료를 만나면 은근히 네가 뭘 알겠느냐는 엘리트의식이 대단한 것 같아. 자기들만 그 분야를 독점하고 있는 것 같이 행동하고. 그래서 만나기 전에 도서관과 자료실에 가서 입시 때 같이 열심히 공부를 해. 막연하게 일방적으로 듣고 필기하는 기자가 아니라 본질을 알고 묻는 기자가 되고 싶어. 취재원을 저녁에 만나면 먼저 술부터 쓰러지도록 마시게 하는 거야. 그 벽을 통과해야 정보를 약간 줄까 말까 하는 거지. 폭탄주를 열 잔쯤 받아마시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 죽을 것 같아. 그때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를 하는데 비몽사몽 취중에도 그걸 잊어버릴까봐 걱정이 되는 거야. 그래서 오줌을 누는 척 하고 잠시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 올라앉아 수첩에 메모했지.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면 그 사람은 관용차를 타고 늠름하게 가는 데 나는 한밤중에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속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곤 해.”

그 친구는 엘리트 경제관료나 학자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자존심으로 미국의 명문대학에 가서 경제학을 배우고 오기도 했다. 직업적 승부 근성이 강한 친구였다. 그는 잠자리에서도 왜 연탄값이 오르냐고 잠꼬대를 한 걸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그런 그는 메이저신문의 편집인을 하고 방송사 사장을 마치고 퇴직을 해서 지금은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들은 좋은 신문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다.

신문은 현대의 역사다. 훌륭한 기자들이 쓰는 기사는 역사책을 읽는 것 같이 내게 유익했다. 그런데 요즈음 신문을 보면 역사가 아니라 선동인 것 같은 느낌이다. 신문이 세상에 먼지를 날리고 진흙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신문이 편을 갈라 미워해선 안 될 사람을 미워하게 하고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게 하려고 인위적인 언론공작을 펼치기도 하는 것 같다. 내용도 그렇다. 미숙한 마음으로 사회를 보고 거기에 미숙한 해석을 해서 보도한다. 신문에 나오는 선악은 진정한 선악이 아니라 기자가 본 선악이다.

나이가 아직 젊고 경험도 부족하고 선악을 분별할 힘이 부족한 사람이 정한 선악이다. 그들의 의견이 그 신문사의 의견으로 세상에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읽고 때로는 그걸 믿는다. 우리의 판단은 신문 때문에 왜곡되고 공평함은 마음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기자들의 습관화된 부정적인 시각이 사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사회는 선동에 의해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생각을 높게 하고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게 하는 그런 신문이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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