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암흑 속 ‘빛의 증명자’ 조영래 변호사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의 사건에 뇌물을 바친 죄인으로 구속된 국정원장의 변호인으로 재판에 참여했었다. 국정원장이 청와대에 보낸 예산은 뇌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박근혜대통령을 직접은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뇌물을 보내라고 요구할 품성도 아닌 것 같았다. 1심 법원과 2심 법원의 판사들이 모두 뇌물이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유독 대법관만이 뇌물이라고 했다. 정치 색깔이 가득 낀 짙은 색안경을 끼고 본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고 그걸 인정하는 게 민주사회다.
나는 재판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질문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판장에게 답변을 했다. 법정에서 나왔던 증인들 얘기와 행동 그리고 수사나 재판의 이면을 꼼꼼히 소설같이 써서 상고이유서에 담아 두었다. 그걸 본 한 출판사에서 책으로 펴내는 걸 알았다.
나는 감옥에 있는 국정원장에게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국정원장은 그 책이 진실의 증명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하면서 직접 원고를 수정하기도 했다. 확고한 동의였다. 그러나 국정원장의 부인은 분노하는 것 같았다. 담당 변호사가 공명심에 빠져서 책을 내는 것으로 안 것 같았다.
재판장이 괘씸하게 보고 중형을 선고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했다. 말을 하면 구차해지고 변명같이 들릴 게 분명해서 입을 닫았다. 미워하는 눈길도 묵살해 버렸다. 오해란 없다는 생각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주관적인 인생관과 경험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는 것이다. 35년이 넘게 변호사 생활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과 곡절을 직접 체험했다. 내가 본 세상은 어둠이었다.
성경을 보면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물을 가린다고 했다. 그런 게 세상인지도 모른다. 내가 변호사 개업을 했던 1980년대 초만 해도 수사기관에서 고문이 횡행했다. 얻어맞아 온몸이 뱀껍질 같이 얼룩진 걸 보기도 하고 뼈가 부러진 사람도 봤다.
법정에서 판사에게 여러 번 고문을 얘기했다. 그냥 보면 알 수 있는데도 그 고문 사실을 인정해 주는 판사는 없었다. 교도소 내에서 맞아 죽어도 담당 검사는 그걸 수사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같이 아파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재판을 하고 공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수사를 할 수 있나 의문이었다.
약한 사람에게는 삶은 절실하지만 힘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장난인 것 같기도 했다. 모략을 당한 사람이 절규를 해도 법은 그들의 말을 시큰둥하게 듣는 경우가 많았다. 억울함에 손가락을 잘라 재판장에게 보내도 되돌아 가는 것은 냉정한 눈빛뿐인 경우도 있었다. 암흑의 세상이 광명한 세상으로 바뀔 수 없을 것 같았다.
낡고 부패한 이 세상이 갑자기 바닷속으로 침몰하고 신세계가 떠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빛 그 자체라는 예수도 자기를 암흑의 손에 넘겼다. 그러나 나는 몇 명의 선배 변호사들을 보면서 암흑 속에서도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운동권에 있던 한 친구가 민청학련사건으로 민주화투쟁 세력이 쑥밭이 됐을 때 다시 과감하게 치고 나간 투사가 김근태 선배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김근태가 고문받아 생긴 피딱지를 받아 고문을 세상에 폭로한 변호사가 있었다. 그 게 없었더라면 그 고문은 영원히 묻혀버렸을 것이다.
그 시절 부천서에서 여대생에 대한 성고문 사건이 있었다. 조영래 변호사가 그 사실을 법정에서 폭로했다. 판사들은 진실에 얼굴을 돌리고 외면했다. 정의보다 중요한 자신들의 안전과 출세 때문인 것 같았다.
인권변호사 조영래는 그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대통령과 측근의 권력자들에게 죄를 죄로, 잘못을 잘못으로 규명하고 꾸짖었다. 그런 소수의 변호사들은 당시 암흑 속에서 빛의 증명자였다. 나는 그들에게 감명을 받았었다.
하나님이 명령하는 것은 벅찬 사회의 개혁이 아니라 단순한 정의의 증명일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암흑이 어느 곳에 있든지 그것을 꾸짖고 암흑 속에서 작은 빛의 증명자는 될 수 있는 것이다. 미약하지만 그런 증명자가 되려고 노력해 왔다.
암흑은 이길 수도, 없애기도 힘들다는 생각이다. 성급하게 암흑을 쫓으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빛의 증명자로서 고난을 당하면 다소간 세상을 비출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