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대통령을 왜 욕해요?

금강산에 있는 김일성 찬양 기념비

북한의 금강산을 간 적이 있다. 남북관계가 좋지 않을 때라 관광객이 거의 없었다. 초대소에서 나와 혼자 산책을 나섰다. 계곡을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햇빛에 반짝이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내 겸 감시를 하는 20대 여성이 함께 걷고 뒤에 멀찌감치서 다시 우리 두 명을 감시하는 눈이 큰 30대쯤의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나를 안내하는 북한 여성이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남조선에서 오신 선생님이 아무 데나 막 앉을까봐 정말 걱정이예요.”

전날부터 조심성 없는 나를 유심히 관찰한 것 같았다.

“아무 데나 막 앉다니? 그게 무슨 소리죠?”

“여기 금강산에는 김일성 수령이나 김정일 장군이 현지지도를 나왔을 때 계셨던 자리에 세운 작은 기념비석들이 여러 개 있어요. 그런데 남조선에서 온 선생님이 다리가 아프다고 함부로 그 위에 앉을까 봐 나는 겁이 나는 거예요.”

“그런 기념 비석이 어디 있어요?”

내가 물었다.

“바로 저기 길가에도 보이잖아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 자그마한 돌비석 비슷한 게 세워져 있었다. 다리가 아플 때 앉기에 딱 맞는 크기였다. 그녀의 걱정을 알 것 같았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묘한 짓궂은 표정이 스치면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남조선을 보면 대통령을 동네 개 부르듯 막 욕해요. 대통령은 나라 전체의 어른이고 집으로 치면 아버지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어버이를 그렇게 욕할 수 있어요? 그런 사회가 기본 예의가 있는 곳인가요?”

그녀의 말에는 뼈가 들어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왕도 뒤에서는 욕을 한다는 옛말이 있는데 알아요?”

“그 말은 알아요.”

“아버지한테 막 불평하고 뒤에서 욕도 할 수 있는 자유가 좋은 걸까? 아니면 속으로는 아니면서 겉으로는 아버지가 겁이 나서 공손한 체 하는 게 좋은 걸까?”

그녀는 내 말을 잠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욕할 수 있는 자유가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녀는 단번에 자유의 의미를 깨닫는 것 같았다. 솔직하고 순진했다.

“변호사라는 게 무슨 일을 하는 직업입네까?”

그녀가 물었다.

“정부와 싸워 사람들의 자유를 찾아주는 일을 하죠.”

그녀의 수준을 감안해서 그렇게 압축했다.

“와 쎄네. 어떻게 정부와 싸울 수 있단 말입니까?”

자유 자체보다 정부에 대한 저항에 더 놀라는 그녀였다. 저항의식이 아예 싹이 잘려 버린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은 김일성 왕조체제였다. 정통공산주의자들이 저항하다가 숙청되기도 했다. 나는 그쯤에서 말을 멈추었다. 멀리서 우리 둘을 감시하는 남자의 눈길이 위험수위에 다다른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서 일기를 쓰면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실 앞에는 액자에 걸린 교훈이 이렇게 걸려있었다.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

학교는 내게 자유인을 가르쳤다. 그런데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통행금지 때문에 밤이면 밖에 나가 다닐 수 없었다. 머리도 빡빡 깎인 채 검은 교복 속에 영혼이 갇혀 있어야 했다. 대학에 가도 자유가 없었다. 대통령을 모독하면 국가원수에 대한 죄로 처벌됐다. 권력을 비판하는 말이나 글을 쓰면 정보부로 잡혀가 두들겨 맞는 세상이었다.

나는 자유인이 되고 싶었다. 변호사를 시작할 때 <빠삐용>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내게 주는 메시지 같이 떠올랐었다. 광활한 바다 한가운데 외롭게 소외되어 있는 섬에 갇혀 있는 죄수를 자유의 땅으로 건네주는 뱃사공이 되고 싶었다. 헤겔은 역사는 자유가 확장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혼자만 자유를 가진 왕을 두드려 패 그 자유를 나누는 과정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네가 찾아와 주었다고 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의 자유를 찾아주라는 뜻으로 들렸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일에 봉사하는 것 그것이 위대한 사업 같았다. 국민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는 아무리 물질을 제공해도 좋은 정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것은 자유다. 자유는 생명인 걸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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