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촌철] 불의한 세상을 이기는 비밀···”정의는 일단 짓밟혔다”

한국사회는 그에게 많은 빚을 졌다. 평생을 인권보호에 바친 조영래 변호사(오른쪽)와 그가 변호를 맡았던 부천경찰서 성고문 피해자 권인숙씨(왼쪽)

내가 대학 다니던 시절 주위에는 용기 있는 투사가 참 많았다. 대학생으로 공장에 취업해 비참한 노동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기도 했다. 격렬한 시위에 적극 가담해 스스로 감옥에 가기도 했다. 내가 군복무 당시였다. 김동길 교수 등 여러 지식인들이 군사법원에 끌려다니는 걸 목격했다. 그들 중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이해찬도 끼어 있었다. 그들이 갇혀 있는 육군교도소는 지옥이었다.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냉기가 흐르는 어두침침한 감방에서도 사람들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하루종일 무릎꿇고 있게 만들었다. 정의를 부르짖은 그들은 힘에 짓눌리고 밟히고 얻어터졌다. 군사재판도 엉터리였다. 마네킹 같은 자격 없는 일반장교들이 법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떤 항변도 정의의 소리도 그들은 들을 능력이 없는 것 같았다. 주인과 적 이분법적으로 세뇌된 도척의 개는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충성하지 공자님도 언제든지 물어뜯을 수 있었다.

용기가 없고 비겁했던 나는 그 무렵 스스로 사회의식에 눈뜨기를 원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출신은 한번 찍히면 끝이었다. 이 사회에서 빗자루에 쓸려나가는 쓰레기 신세였다. 그런 게 두려웠다.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개천 바닥에서 다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같았다. 그래서 나는 비겁했다. 스스로 정신적 전족을 채우고 권력에 순응하려고 했다.

그러나 양심을 뭔가가 수시로 찌르는 바람에 괴로움을 당하기도 했다. 팔십년대 중반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 섰다.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잡혀 온 사람이 재판을 받을 때면 법정의 공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곳은 그들의 당당한 연설장이었다. 대부분 판사들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시대 상황의 인식이 부족하고 인문학적 소양이 없었다. 인생관과 가치관이 달랐다.

방청석에서 구호가 외쳐질 무렵이면 법대 위 판사들의 판사들의 눈동자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느 순간 도망을 칠까 살피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피고인석에 서 있던 사람들이 신고 있던 검정고무신을 벗어 손에 드는 순간이 되면 재판장과 판사들이 번개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열순으로 뒷문 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 뒷통수를 날아가는 검정고무신이 마지막 순번이었다.

검사는 한발 앞서 이미 도망친 후였다. 군가 같은 운동권가요가 울려 퍼지는 법정의 한 가운데서 변호사인 나는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러면서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권력은 힘으로 공포로 정의를 누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부천경찰서에서 형사 한 명이 공장에서 일하던 여대생을 잡아 성고문을 했다는 소리가 변호사 사회에 들렸다.

시대에 앞장서 저항하던 조영래 변호사가 그 사건을 맡았다. 형사가 취급하던 사건 내용은 간단했다. 여대생은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바꾸었다. 그게 다였다. 무렵 미성년자들도 나이트클럽에 가기 위해 그런 짓을 장난같이 하기도 했었다. 문제는 운동권에 지나치게 민감한 권력의 반응이었고 그에 앞장선 경찰의 성고문사건이었다.

정권의 도덕성에 연관된 그 사건은 철저히 묵살되어야 했던 것 같다. 권력의 지시를 받은 검사는 판사실을 드나들면서 인권변호사의 성고문 주장을 묵살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선고할 징역형까지 제시했다. 피해를 당한 여성의 증인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호사는 그런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기피신청을 했다. 그것도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권력의 시나리오대로 정해진 징역형이 선고됐었다. 불의와 힘이 정의를 이기던 시대였다. 당시 나는 처절하게 무력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세상을 오래 살아오면서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정의가 승리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정의는 힘으로 이기지 않았다. 패배함으로써 이겼다. 마치 의인이 가난하고 세상의 핍박을 받으면서 그 빛을 발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까. 유대인과 빌라도는 결백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유대와 로마는 얼마 후 망하고 예수의 신도들이 로마 전체를 지배했다. 한 의인의 죽음에 의해 로마제국이 점령당한 것이다.

내가 살아온 세상도 그런 것 같다. 정의는 일단 짓밟혔다. 그러나 폭력으로 의인을 눌렀을 때 불의한 권력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그 시대 십자가를 졌던 사람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당시 권력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종적도 없다. 나같이 무기력한 사람들은 불의에 패배하여 세상을 이긴다는 비밀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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