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헌신’ 김옥길-김동길 같은 남매 어디 또 없소?

1974년 긴급조치 4호 사건으로 15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던 연세대 김동길 교수(오른쪽)가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자 누나인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왼쪽)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가운데는 김 교수 변호를 맡았던 한승원 변호사

지난 10월 4일 별세한 김동길(山南 金東吉) 연세대 사학과 명예교수와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 남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우리나라 보수진영 원로 인사인 김동길 명예교수는 지난 2월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회복했지만 3월부터 건강이 악화해 병원 입원 뒤에도 상태가 호전되지 못했다.

김동길 교수의 유서가 ‘김옥길기념관’에서 10월 5일 공개되었다. 김 교수가 2011년 10월 2일 생일날 원고지에 직접 써서 이철 당시 연세대 의료원장에게 보낸 서신 내용은 “내가 죽으면 장례식·추모식을 일체 생략하고 내 시신은 곧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기증하여 의과대학생들의 교육에 쓰여지기를 바라며, 누가 뭐래도 이 결심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법적절차가 필요하면 미리 알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있다.

이에 고인의 뜻에 따라 시신은 연세대학교에 기증됐고, 김옥길기념관을 포함한 자택은 2020년 이화여자대학교에 기증됐다. 고인의 지인들은 “집을 제외하고 남은 재산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길 교수는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저세상으로 떠나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몸소 실천하신 큰 어르신이다. 

김옥길(金玉吉, 1921-1990) 교수는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기숙사 사감으로 근무(1943-49)하다 1949년 9월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교로 유학 가서 기독교문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1952년 2월에 취득했다.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였다. 그리고 1957-58년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행정을 공부했다. 1952년 3월부터 1979년 9월까지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봉직하였으며, 그 후 이화여대 명예총장으로 봉사했다.

김옥길 교수는 1961년 김활란(金活蘭, 1899-1970) 박사 후임으로 1961년 9월 40세의 젊은 나이로 여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에 취임하여 1979년 9월까지 활동하였다. 이화여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1961년 9월 받았다. 1979년 12월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어 이듬해 5월까지 근무했다.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1970)을 그리고 1990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마리아 클라라 상(필리핀, 1976), 인촌문화상(1982), 유니온 신학대학원 공로상(미국 뉴욕, 1983), 적십자 인도상 금장(1990) 등을 수상했다.

김옥길 교수는 유신반대 시위 때도 학생들의 맨 앞에서 시위대를 보호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대규모 시위에서 그는 정문을 뚫고 나가려는 학생들에게 “나가려든 먼저 나를 밟고 나가라!”로 소리쳤었다. 이화사(梨花史)에 ‘남기고 싶은 말’로 기록된 이 한마디는, 학교 밖으로 맹진하려던 행렬의 속도를 일시에 중단시켰다. 당시 총학생회장이 숨을 곳이 없자 김옥길 총장이 나서서 숨겨주었는데, 그에 감동받았던 총학생회장이 후에 이화여대 총장이 된 김선욱 교수(제14대 총장)이다.

김옥길 교수는 1921년 3월 10일 평안남도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 110에서 출생하여, 1990년 8월 25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대신동 92번지에서 소천했다. 1989년 직장암이 발병해 수술과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나빠져 1990년 7월 퇴원하여 자택으로 돌아왔으나 1개월 뒤에 별세했다. 김옥길 교수가 여생을 보낸 대신동 자택은 개축되어 현재 ‘김옥길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동길 교수는 1928년 10월 2일 평남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면장이었던 부친 김병두(金炳斗)씨는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가세가 기울었고, 어머니가 가족을 돌보며 4남매를 공부시켰다고 한다. 1946년 북한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자 월남했다. 그는 나이 열여덟에 시골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인생을 시작하여 대학에 다닐 때에는 주일학교 교사였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51년에 연희대학(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후 1954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 에반스빌대학에서 석사(역사학)학위를, 그리고 보스턴대학에서 에이브러햄 링컨 관련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에 김동길 교수는 3개 대학에서 각각 문학, 사학, 철학을 전공해 문사철(文·史·哲)을 섭렵했다.

미국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1960년 연세대 전임강사에 그리고 1961년 조교수로 임용되어 부교수를 거쳐 교수로 승진했다. 연세대학 교무처장, 부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신랄한 풍자와 해학으로 인하여 학생들로부터 인기 있는 교수였으며, 그의 ‘서양문화사’ 강의에는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강의실이 아닌 대강당에서 수강했다. 또한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신랄한 정치와 사회 비판으로 명성을 얻었다.

김동길 교수는 은퇴하기 까지 교편을 잡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김 교수는 그 오랜 세월 제자들이나 후배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남의 말을 하지 말라. ▲굽히지 말고 떳떳하게 살라. ▲남을 괴롭히지 말라. ▲언제나 약자 편에 서라. ▲부지런히 살라. ▲건강이 제일이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라. ▲최선을 다하면 된다. ▲친구 두 서넛은 있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죽음 앞에 의연하라 등 열두 가지 교훈이다.

현실 정치를 비판하던 김동길 교수는 1991년 정치 참여를 선언하고 새한당을 창당한 뒤 정주영(鄭周永, 1915-2001)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기 위하여 만든 보수 성향의 야당인 통일국민당에 합류했고 1993년에는 대표에 추대되었다. 본인도 제14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원내진입에 성공하나, 14대 대선에서 정주영이 패배한 뒤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통일국민당의 대표로 추대됐다.

1990년대 초반에는 그를 패러디한 개그맨 최병서가 진행한 ‘MBC 일요일 밤에’의 ‘이게 뭡니까’ 코너가 인기를 끌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정치 활동과 동시에 방송, 언론 활동을 하였고 보수 성향의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에 위촉되지만 자민련 전국구 공천헌금설로 인해 박찬종, 김종필과 잇달아 갈라지면서 그해 1994년 5월 차기 총선거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1996년 3월 자유민주연합 탈당했다.

1990년대 후반 국민행동본부, 반핵반김국민협의회 등의 보수주의 단체에서 반공 시민단체 원로로 활동하면서 강연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김정일의 북한정권과 조선로동당, 조선인민군, 김대중과 노무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햇볕정책’ 등을 비판하는 강연과 활동을 하였다. 2009년 4월 검찰 수사에서 뇌물 수수설을 부인하는 노무현(1946-2009) 대통령을 비판, 대국민 사과 차원에서 자살하거나 재판받고 복역하라고 주장했다.

김동길 교수는 100권 안팎의 저서를 남겼다. 1977년에 <가노라 삼각산아> <역사의 언덕> <불어라 봄바람> <하늘을 우러러> <끝이 없는 이 길을> 등 5권, 1979년에는 <영원히 남는 것>, 1982년에 <그래도 길은 있다>, 1983년에는 <하느님 나의 하느님> <생각하며 산다> <죽어서 흙이 될지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등 4권을 발간했다. 그리고 1984년에 3권, 1985년에 3권, 1986년에 9권, 1987년에 16권, 1988년에 12권, 1989년에 7권, 1990년 3권, 1991년 7권, 1992년 9권, 1994-95-96년에는 매년 1권씩을 발간했다.

1997년에는 3권(김동길 칼럼집, 한 시대의 증언1, 한 시대의 증언 2)을, 1998년 2권(한 시대의 증언3, 링컨의 일생)을, 그리고 1999년에는 1권(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발간했다. 2000년 이후에는 모두 7권을 저술했다. <밝은 세상 좋은 나라>(2000년), <대통령 각하, 이게 뭡니까>(2003), <북한자유선언>(2007), <자유여 너를 위해 목숨 바치게 하라>(2008), <MB 이게 뭡니까>(2009), 그리고 2012년에 <젊은이여 어디로 가는가>를 발간했다.

김동길 교수는 언제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사랑과 진심, 의협심과 정의감을 보여 주신 분이다. 대개 사람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해지기 마련인데, 김동길 교수는 약자에게 다정했으며 강자의 잘못 앞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