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로맨티스트 김동길 교수···’민주투사’에서 ‘파워 유튜버’까지

1974년 긴급조치 4호 사건으로 15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던 연세대 김동길 교수(오른쪽)가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자 누나인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왼쪽)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가운데는 김 교수 변호를 맡았던 한승원 변호사

“1992년 봄이 되기 전 추운 날, 시내 모처에서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기업으로 성공한 그가 대학에서 한평생을 보내고 은퇴한 나를 왜 보자는지 그 뜻을 잘 모르고 만났다. 같은 내용이 적힌 서류 2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가 썩으니 기업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돈은 내가 벌어서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힘을 합하여 정치를 바로잡는 일을 한번 해봅시다’ 그 서류는 정주영과 김동길이 의형제를 맺는다는 내용이었다. 의형제가 되는 걸 문서로 밝힌다는 일이 내겐 무척 생소했다. 문서 2통에 자기 도장을 찍어 와 나에게도 날인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지장을 찍었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4일 밤 10시 50분 호흡기 질환으로 타계했다. 시신은 세브란스 의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유족들은 전했다. 

김동길 교수는 1928년 10월 2일 평남 맹산에서 태어났다. 미국 보스턴대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와 14대 국회의원, 신민당 공동대표를 지냈다. 나비 넥타이와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수많은 강연과 기고, 방송, 유튜버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설파했다. “기력이 있는 동안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주장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불의를 보고 말을 안 하면 용기가 없는 거지요.” “이승만이 아니었으면 대한민국도 없다”는 그의 말은 ‘반만년 사상 공화국을 처음 세운 것 아니냐’는 게 논거다.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린 1970년대 후반 지식인의 필독서로 꼽히던 김동길 교수의 <링컨의 일생>. 

“이게 뭡니까?”를 말끝에 붙이던 직설 화법도 트레이드 마크였다. 코미디언이나 개그맨도 아닌데 이 말은 항간에 유행했다.

1985년 야당이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직후 설화를 당했다. “3김씨는 이제 정치를 그만두고 낚시나 할 것이고 민주주의를 위해 40대가 기수 역할을 하라”는 문제적 칼럼을 썼기 때문이다. 거센 역풍을 맞을 만도 했다. 당시는 전두환 독재정권이 철권을 휘두를 때였다.

1991년 강경대군 치사사건 직후 “열사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벌집을 쑤신 듯 논란을 빚고선, 강단을 표표히 떠났다. 이후 정치에 입문한다.

새 정치를 주창한 ‘태평양시대위원회’를 창립, 대권후보로 거론됐다. 1992년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에 합류, 후보를 양보했다. 14대 총선 때 국민당으로 강남갑에 출마, 당선해 배지를 달았다.

이후 신민당과 자민련에서 정치 활동을 계속했으나 부질없었다. 먼저 간 JP가 만년에 갈파했듯이 정치는 허업임을 자각했다. 1996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2011년 종편 개국 후 다시 고목나무에 꽃이 핀다. 특유의 직격탄 입담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거다. 시사 프로그램들에 ‘최고령 출연자’로 나와 구수한 언변, 정연한 논리와 고급 유머로 눈과 귀를 붙들었다. 그가 종편 시사프로에 나오면 시청률이 수직 상승했다.

“그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직구’다. 그러나 논거가 붙는다. 중국 고전과 영국 역사, 미국 헌법까지…감성은 청춘이고, 지식은 역대급이다. 직설에 통찰을 더해 철학으로 빛을 발했다.”(방송관계자)

자유를 찾아 넘어온 실향민으로서 자유민주의 기치를 누구보다 드높이 들었다. “백성을 이끌고,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격”이라며 종북의 위험을 경계했다. 단순히 좌우의 차원이 아니라 대한민국 생존에 관한 문제라는 인식에서였다. 구순을 넘겨, 유튜버 노익장도 한껏 과시했다. ‘김동길TV’는 1년도 안 돼 구독자가 30만명을 넘었다.

안철수 후보(오른쪽)가 김동길 교수 손을 꼭 잡고 있다.

올해 초 안철수 당시 후보의 후원회장을 기꺼이 맡았다. 그는 “포기할 줄 아는 사람만이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며 단일화 결단을 집요하게 요구해 관철했다.

고 정주영과는 애증관계다. 좋게 만났다가 불편해졌다. 사이가 좋을 때 정주영이 정치개혁을 주창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머지않아 대통령 선거가 있을 터인데 우리가 만드는 당의 대통령 후보는 국민 사이에 인기가 좋은 김 교수가 나가야지요.”

1992년 겨울 김동길 교수(가운데)와 정주영 회장. 대선후보를 놓고 소원해진 두 사람 표정이 서먹서먹 하기만 하다. 왼쪽은 김광일 전 의원

김동길은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묵묵히 담벼락만 보고 있었다. 국민당이 출범했고 당대표에 정주영이, 그는 최고위원이 됐다. 국민당은 현대의 수 많은 직원을 동원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돈의 힘과 재벌의 조직은 위력적이었다.

1992년 3월 총선에서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해 31명을 당선시켰다. 고인은 서울 강남갑에 출마해서 당선했다. 국민당은 대선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전당대회를 5월로 예정했다. 전당대회 직전, 정주영은 고인이 살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왔다. 혼자 찾아와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김 교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해요.”
“나이도 60이 넘었고 결혼할 때는 지났습니다.”

정주영이 이렇게 덧붙였다. “김 교수도 결혼해서 가정이 안정돼야 해요. 김 교수가 결혼한다면 200억은 줄 수가 있는데.”

고인은 정색을 하고 딱 부러지게 답했다. “앞으로 내가 결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결혼하지 않았을 뿐 늘 사랑하고 살았고, 여성을 떠나본 적도 없다”고 고인은 털어놓았다. 고인을 나는 카사노바라고 보진 않는다. 그는 로맨티스트였는지 모른다.

고인과 10년 전 쯤, 딱 한번 고급식당에서 여러 명과 담소했다. 그때 ‘약간 늙었구나, 그래도 입담은 여전하구나!’라고 나는 느꼈다.

고인이 당시 일행에게 “집으로 초대해 국수를 내겠다”고 했다. 어떤 일로 해선지 기억은 빛이 바랬지만, 아무튼 못 갔다. 자유민주를 부르짖은 콧수염 김동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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