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38] ‘TV조선 상한가’ 김동길은 ‘反유신 선봉장’ 출신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해방 후 대부분의 정당들은 실현해야 할 정책이나 대중적 기반에 기초한 이념의 구현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단지 권력교체기의 유리한 정치상황을 이용하여 대세를 장악하거나 이에 접근하기 위한 목적을 은폐하기 위해 정당이란 외피를 최대한 활용했을 뿐이다. 결국 정책입안과 제도적 실현방안을 모색하려고 정당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다수 계파의 정치적 안전판(political safety-valve) 노릇을 해왔다.
정당이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 고민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계파가 모여든 믿음직스런 대피소 이외의 별다른 역할을 지니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치외적 환경의 극심한 파행이나 예측불가능, 그리고 정당 내부의 인적요소들이 지니는 원천적 한계 등이 정당 자체의 존속보다 일정 계파의 연명가능성을 먼저 고민하게 만든 주원인이다. 정당이 정책형성을 위한 제도적·법적 틀을 마련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은 결국 정당 내 신경조직의 한 단위로 각 계파들이 정책을 충분히 연구하거나 이를 입안·관철해 나갈 능력이 없었음을 뜻한다.
11대 국회의 정당별 정강정책이나 기조 역시 당대 정국을 결정한 주요 계파들 간의 묵시적·잠정적 합의결과에 불과했다. 계파의 실제행동이나 존재양식과 아무 관계없는 한낱 공허한 기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들의 정책기조와 행간의 의미에 관심을 두는 까닭은 경직된 양당구조의 불균형과 모순이 일단 제거된 후 다당제의 출발점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정책의 입체성을 일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같은 예외성이 이어지는 몇 차례 선거나 그에 따라 재구성되는 정국을 견딜 만큼 강한 내구력을 담보하진 못한다.
한국정당사에 나타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것이다. 초라하게 연명한 정당들이 설령 해체된다 해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계파의 신경조직은 끊어지질 않는다는 점이다. 또 목숨을 연장하는 데 필요한 일정량의 산소와 식량은 상황에 걸맞는 정책명분이나 유권자들의 일방 지지 혹은 기대의 채널을 통해 공급된다는 점이다. 정당은 죽었어도 계파는 살아남았고 그럴 수 있도록 도와준 건 지속적인 환멸과 실망 속에서마저 또 다른 기대를 불러일으킨 정책이란 이름의 상징적 시그널뿐이었다.
재야 파벌의 정치·정책성향
재야의 정치·정책성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도권 파벌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재야는 얼마나 적극적이거나 설득력이 있었을까. 나아가 그들은 기존 제도권 계파의 정치력을 대체할 내적 응집력이나 정치적 통합능력을 스스로 발휘했는가. 미래의 제3세력으로 투표혁명과 시민혁명을 담보할만한 현실적 능력도 갖고 있었던 걸까.
이같은 물음은 적어도 4공 이전에 제기하기가 곤란했다. 한국정치가 양당구조 속에서 계파투쟁과 갈등이란 특수성을 핵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대체세력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걸 뜻한다. 재야의 등장은 그만큼 제도정치의 계파적 한계와 도덕적, 정치 윤리적 타락에 대한 응징과 도전이었다. 재야가 독자적 대체세력으로 힘을 갖는지 여부는 그만두더라도 이들의 등장은 한국 보수야당과 여당 모두에게 중대한 도전세력으로 인식되기 이른다.
그러나 1992년 3·24 총선에 나타난 유권자들의 반(反)재야적 정치성향은 이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부정한다. 게다가 독자세력으로 존속할 것인지조차 회의하게 만든다. 이같은 반(反)재야성의 뿌리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정치적 한계는 뭘까? 이제 이들 전반에 관해 살펴보자.
‘재야’란 용어를 사용하면서부터 유신 이후 그들의 실체 논란은 상당기간 계속된다. 그러나 재야란 누구를 지칭하며 어떤 세력들을 총칭하는지는 모호했다. 많은 사람들이 재야의 그림자와 그 존재를 마주하곤 했지만 정작 그 실체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는 이들의 눈과 정치적 의도에 따라 재야는 크기도 했고 혹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작기도 했다. 따라서 그 형체 역시 정확하지 않았다. 반유신독재 투쟁에 앞장섰다가 1992년 국회로 입성한 사람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동길씨다. 김씨는 정주영의 국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 뱃지를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