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⑦]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대···거여야소·대여강야·여소야대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교수, <정치와 영화> <한국 성인만화의 정치학> 저자] 권력교체기나 정치적 격변기에 계파의 이동이 잦아지는 현상은 현대사 전체를 관통한다. 하지만 정치군부의 등장과 퇴조를 전후하여 파행은 특히 고조된다. 5공 6공의 정치?계파이동은 박정희 시대의 상대적 안정기를 지나 또 다른 문제의 시기로 진입한다. 그것은 개발독재의 프리미엄을 고스란히 챙긴 전두환의 관제정당 만들기가 정치과정을 왜곡시킨 만큼 불확실하거나 예측 불가능한 문제였다. 게다가 6공은 5공의 상대적 안정성을 무너뜨린 불안의 시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6공의 정치조건은 지속적 민주화와 탈권위주의를 두 축으로 삼는다. 이들이 중첩 작용함으로써 여러 역기능들은 정치의 민주화와 제도화 작업에 적잖은 어려움으로 다가간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현상들은 마치 민주화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필연의 모습으로 비쳐지거나 조급한 기대심리가 빚어낸 파행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고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10?26(1979)을 계기로 다시 군부화한 당국은 정치적 자유화의 기회를 ?차단한다. 국민들의 직접선거를 거치지 않고 권력을 승계한 전두환은 유신 이후의 정통성 위기와 비민주적 문화를 그대로 이어간다. 이에 따라 5공은 새로운 권위를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권력자원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개혁조치들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평가가 낮고 시민사회의 정치참여욕구가 폭발적으로 상승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기대효과는 정치의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투표혁명으로 노골화한다. 노태우 후보의 과반수 득표실패라는 전대미문의 결과는 기왕의 정통성 위기위에 ‘대표성의 위기’까지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은 해방 후 어느 대통령 당선자들도 보이지 않았던 일종의 치욕이었다.
그러나 6공은 평화적으로 이양된 대한민국 최초의 정권이란 통치의 명분과 1987년의 6?29조치로 이 같은 이중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정치적 기대상승욕구를 방임함으로써 탈권위주의의 비용을 고스란히 무릅쓴다. 집권수뇌부 스스로 권위주의시대의 종말을 선언하고 민주화와 자유화를 동시 보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연출하자 ‘박정희-전두환’ 통치기에 배양된 정치적 반발 심리는 곧바로 드러난다.
사회전반에 걸쳐 기존 권위에 도전하고 이를 해체하려는 폭력사용이 미화되거나 심지어 이를 호소하는 상황까지 나타난다. 아노미를 우려한 사회 한쪽에서는 당연히 보수우익논리가 동원되고 있었고 과거에 안주하며 침묵하거나 방관하려는 노스탤지어 또한 두드러진다. 그 가운데 ‘대학생-지식인-노동자’로 연계되는 민주화 추진세력은 분명한 자기목소리를 내면서 대다수 중간계층의 침묵을 비겁한 행위로 단죄하기도 한다. 하지만 점차 ‘무시할 수 없는’ 투표혁명의 주체로 중간계층의 면죄가 확실해지자 그들은 자신감을 갖는다.
80년대는 70년대의 ‘자식(子息)’이다. 90년대 또한 80년대의 유산이 지속적으로 증폭된 결과였다고 볼 일이다. 앞으로의 한국정치변화 역시 이 같은 역사적 유증(遺贈)의 되돌이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 권력구조의 개편과 함께 대통령 중임제 개헌을 포함, 90년대를 회고하고 그 ‘이후’를 살피는 데 먼저 고려할 문제는 한국정당의 구조다. 정당은 여전한 제도적 정치행위주체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제껏 가해진 숱한 비판이나 환멸이 지속된다고 해도 정당은 여전히 이익표출과 집약의 주체이며 의회는 이러한 이익을 대변·구현하는 대화공간이라는 데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당구조의 문제는 뭘까? 현 정당구조가 탈권위주의적 민주화시대의 정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서 비롯되는 걸까? 지자제 실시이후 지방의회와 정당의 관계는 어떤가? 기존 정당구조로는 시민사회의 정치적 기대를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면 그 구조는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가? 기존의 여야가 보수논리에 안주하고 진보정당의 각개 약진을 끝내 포용하지 못한다면 그들 간의 차별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치적 중산층이 집단행동 아닌 ‘표’로 분출할 때마다 한국의 정당구조는 지탱해야 하는가, 개편되어야 하는가? 이상의 물음들은 변혁기 한국의 정치상황 속에서 정당구조의 문제와 맞물린다.
80년대 정당구조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수정당체계가 자리 잡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다원적 시민계층의 지지기반을 갖고 등장한 게 아니라 집권층의 상징조작과 정치 공학에 따라 ‘관제정당’의 틀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다. 그 구조는 출발부터 치명적 한계를 내포한 셈이다.
그러나 80년대 다수정당체계가 대중 정당의 기반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당시의 정당구조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정당 만들기’에 대한 집권층의 의도 말고도 과거의 양당제가 빚은 여러 정치적 폐단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발과 새로운 기대심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군부는 바로 이런 정치심리가 권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최대한 활용되길 바랐고 초보적 수준에서나마 그 기대를 현실화하는 데 성공한다.
11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한국의 정당구조는 결국 해방 후 지속된 양당 구도(자유당 VS 민주당·?민주당 신파 VS 구파·?공화당 VS 신민당 등)로부터 다수정당 간 경쟁과 대결로 단절적 변화를 경험한다. 그 후로도 이러한 변화는 12대 총선결과에 계속 반영된다.
당시의 모습을 살펴보자. 11대 총선에서 군부세력에 의해 창당된 민주정의당(1981.1.15 창당)이 여당으로 등장하고 다수 야당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친여적인 민주한국당은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 12대 총선에서는 정치활동금지가 해제된 인사들과 재야인사를 주축으로 한 신한민주당(1985.1.22 창당)이 11대 총선 당시 제1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야당진영의 수위를 차지한다. 민주한국당의 의석수(35석)가 신한민주당의 절반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민주한국당은 사실상 군소정당으로 전락한다.
한편 6공 출범직후 실시된 13대 총선(1988.4.26)에서는 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기대심리폭발로 야당세가 급속히 커진다.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 지지도는 34.0%로 나타나 11대(35.6%), 12대(35.2%)에 비해 더 떨어졌고 정통야당인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 지지도는 집권여당을 단연 압도하는 42.1%에 이른다. 더구나 민주공화당 후신인 신민주공화당도 15.6%의 지지율을 확보한다. 이로써 집권여당의 존립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요컨대 일당 지배체제가 붕괴하고 야권 우세의 정국구도가 등장함으로써 정당정치와 의회정치의 활성화를 기대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