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②] 파벌은 ‘난공불락’···정치발전 가로막는 주범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정당은 계파가 아니다. 이 문장의 주종관계는 바뀌어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계파는 정당이 아니다. 하지만 정당이 지니는 문제와 계파가 지니는 ‘그것’이 결코 같지 않기 때문에 논의의 필요는 진지해진다. 여기서 이들 둘을 모조리 따지고 뛰어넘을 묘안을 찾기란 힘겹다. 다만 계파의 문제를 고치지 않는 한, 정당의 문제 역시 극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우선 착안할 따름이다. 문제를 ‘문제’로만 방임하지 않겠다면 방법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어찌 풀지 난감할 때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뉠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실마리 찾아 한사코 풀어내는 일이 가장 대견할 터이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판단, 급한 마음 못 이기며 가위질하거나 쓸 만한 부분만 골라내는 방법도 있으리라. 굳이 그걸 풀 이유가 어디 있냐며 고스란히 내버려 두는 길도 있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꼭 써야만 하고 새로 살 형편도 안 된다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하는 수 없이 앞의 두 방법 놓고 좀 더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데 머리는 아파진다. 풀긴 풀되 어찌 풀 것인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상황을 인식하는 이들의 시각도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든 후회와 반성 역시 때늦은 일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한국정치를 꼬여있는 실타래에 비유한다면, 그리고 ‘꼬여 있음’을 ‘문제’로 인식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면 해법 역시 위의 상식적 사고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형편없이 꾸겨지고 얼룩진 오늘의 모습을 ‘문제’라고만 인식, 분노할 뿐 어떤 행동도 도모하지 못하면서 이따금 돌아오는 선거나 치르며 눈 흘기면 문제는 해결되는 걸까?

어떤 이들은 한국정치의 ‘꼬여있음’이 직업정치인들 자신의 업보라고 치부해 버린다. 그래서 해결 주체는 이를 쳐다보는 ‘우리’일 수 없고 문제를 저지른 ‘그들’의 일이라 탓하기도 한다. 꼬인 실타래를 끝까지 같이 풀거나 가위로 잘라낼 필요조차 없이 그냥 방치해 두는 게 옳다는 판단이다. 소극적 참여보다 적극적 불참과 정치적 무관심이 낫다는 이들의 판단은 오늘의 한국정치를 밤하늘의 별이나 소가 닭 보듯 만들었는지 모른다. 정치적 무관심의 씨앗이 소리 없는 환멸과 극단적 실망의 싹을 틔워 오늘의 불신초(不信草)도 콩 나무 줄기처럼 자라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인식의 세계에선 자유로울망정, 결과와 책임의 세계에서마저 여유로울 수 없다. 특히 무관심의 약점을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경우, 더욱 더 그 자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는 공간이 바로 이 땅이다. 한국정치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든 이제껏 ‘대입?적용’한 숱한 이론들은 주로 바다 건너 성공적 현상을 보고 만든 것들이었다. 이론뿐 아니라 저들의 정치사상적 고민과 흔적을 통해 우리의 정치현실을 ‘치유·측정’하려 함도 무리였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어느 이론이나 사상체계를 통하더라도 흔쾌히 풀리지 않는 우리 정치의 ‘꼬임’은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풀 것인가 ? 이론이나 사상이란 것들이 그대로 지탱해야 할 필요성 뒤에는 고상하거나 거룩한 언어들로만 묘사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이 역사로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더 이상 우아(優雅)한 언어로만 말할 수 없는 부분은 어디부터인가?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일까 ? 게다가 의외로 간단히 풀릴 꼬임의 매듭 또한 어딘가 따로 있으려나?

한국정치는 정치계파가 결정한다. 정치계파는 누구도 공략할 수 없는 이 나라의 굳건한 지배세력이며 정치발전과 아무 관련이 없다. 계파를 이어가는 여러 젖줄과 생명연장수단은 유권자들이 생각하고 바라는 정치 이미지와 전혀 관계가 없다. 계파의 경계선을 쉴 사이 없이 녹이며 그들끼리 끝없이 변신하고 변명해도 용서되는 땅 또한 바로 ‘여기’다. 계파 간 배신과 복수는 이들 정치적 무리를 끝없이 해체시키면서 한국정치사의 그늘진 계곡을 파놓는다. 의리도 믿음도, 진지함이나 고뇌 따윈 끼어들 틈조차 용납되지 않는 계파 표류의 행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믿음 아래 이 시리즈를 시작한다.

‘계파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적과 동지가 확실히 나뉜다는 사실은 어느 쪽 말과 행동이 옳고 또 누굴 지지해야 할 지 판단하는 데 건전한 긴장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어차피 바람직한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몸담은 계파를 미련 없이 떠나며 보스를 배반하고 게다가 떠나버린 부하의 행적을 뒤쫓아 끝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는 우두머리의 행동은 도무지 뭘 말하는 걸까. 이는 풀어야 할 매듭의 한 꼭지로 남는다. 계파 간 쉼 없는 이합과 집산, 그리고 그 여전한 표류의 역사 주변에서 여전히 새어나오는 ‘가증스러움’은 무엇을 뜻할까?

이 나라 정치계파들이 저지른 행각은 고상한 언어나 지당한 논리로 정리할 수 없다. 그럴 수 없는 이유보다 그래야 할 필요를 더 조리 있게 변명해야 할 판이다. ‘있었던 일들’과 ‘있는 일들’을 다시 정리하고 이를 토대로 ‘있게 될 일들’을 가늠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행각들을 역사적으로 재추적함으로써 다가오는 시간들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의지와 끈기를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칼과 가위를 요구하는지는 여전한 과제로 남는다. 다만 꼬인 실타래를 그냥 쳐다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필자를?지탱해준 힘이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 같은 작업이 표피적 감상주의의 발로라거나 역사적 상식의 재구성이란 역비판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으리라. 보다 중요한 건 너무나 쉽게 잊고 또다시 분노하는 이 나라 유권자들의 두 얼굴뿐 아니라 이제까지의 계파정치를 누구도 종합하려 들지 않았다는 학문적 무관심에 있다.

이 글은 기존의 정치연구문헌들이 취하는 전문적 구성방법을 탈피한다. 정밀한 이론이나 고도로 세련된 개념 틀로 지난 역사를 미시적으로 훑거나 또 다시 무슨 거대 담론의 출현을 기약하며 긴 호흡을 준비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가장 좋은 작업의 변명 근거로는 그간의 상대적 무관심을 꼽을 뿐이다. 알고는 있으나 확실히 정리되지 않은 과거 계파들의 행적. 기억할 수는 있으나 누가 어디서 어디로 떠나갔는지 굳이 헤아릴 순 없는 정치무리들의 표류사(漂流史). 그 ‘어지러움’의 정돈과 ‘헛갈림’의 체계적 축적. 그것이 이 시리즈의 목적이다.

계파는 지금도 암약(暗躍) 중이다. 자기 이익의 극대화와 권력 쟁취의 속내 감추는 저들의 이동이 늘 ‘현재진행형’ 시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행여 자기계파의 패배와 지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정치적 긴장의 항구성 때문이다. 그것이 ‘어른’의 뜻이요, 말 못할 보스의 눈빛이라면 ‘졸개’들이 마다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면 배반과 변절은 기꺼이 허용되고 복수와 설욕 또한 얼마든지 변명할 빈터 마련하는 재주의 기발함도 이 나라 계파들에겐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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