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①] 연재를 시작하며···”인간은 파벌을 만드는 동물”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6개월 남짓 남긴 요즘, 새누리당과 새정치국민연합 등 여당과 제1야당은 청와대 눈치보기와 계파 갈등으로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있다. 국민들은 불안을 넘어 무관심과 냉소를 보내며 정치무관심이 깊어가고 있다. ‘한국정치에 과연 희망은 없는 것인가?’ ‘한국정치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나?’

<아시아엔>은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박종성 교수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펴낸 <한국의 파벌정치>(한울아카데미)를 연재한다. 박종성 교수는 한양대 정외과 졸업 후 서울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혁명이론과 재구성에 관한 연구>(1982)를 시작으로 <박헌영론>(1992), <정치는 파벌을 낳고 파벌은 정치를 배반한다>(1992), <한국의 매춘>(1994), <권력과 매춘>(1996), <인맥으로 본 한국정치>(1997), <정치와 영화>(1999), <한국정치와 정치폭력>(2001), <백정과 기생>(2003), <문학과 정치>(2004), <조선은 법가의 나라였는가>(2007), <한국 성인만화의 정치학>(2007), <씨네 폴리틱스>(2008), <패션과 권력>(2010), <사랑하다 죽다>(2012)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냈다.

<아시아엔> ‘떠나고 머무는, 흩어지고 돌아오는’이란 부제를 달고 나온 <한국의 파벌정치>를 저자와 출판사의 승낙을 받아 매일 연재한다. 박종성 교수와 한울아카데미에 심심한 감사말씀을 드린다.-편집자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인간은 계파를 만든다. 홀로 있기 싫어 무리를 짓거나 기왕의 어딘가 몸담으려다 새로운 무리를 만들게 되는 일도 사람 사는 세상에선 이상할 리 없다. 문제는 ‘만드는 일’ 그 자체보다 일단 만들고 난 후 ‘그들’이 행하는 ‘짓’과 ‘흔적’에 눈길이 갔던 데 있다. 그 즈음 입소문이 더해지는 게 인간사의 흔한 얘깃거리다.

자신의 과오보다 타인의 ‘그것’에 유난히 인색한 우리네 문화는 스스로 몸담는 무리의 ‘흠’보다 경쟁자가 속한 집단의 ‘티’나 ‘잘못’에 먼저 관심의 더듬이를 곧추세우곤 했다. 그리하여 혹여 ‘저들’의 ‘잘못’이 ‘우리’의 ‘실수’나 ‘비리’를 뒤덮어줄 만큼 크기라도 할라치면 그건 곧 숨기지 못할 행복이자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커져가는 반사효과를 신기한 기쁨처럼 확인할 때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커져 갔고 상대를 공격할 핑계도 그에 비례하곤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실력과 공적이 자기 ‘무리’의 힘과 모범적인 자원으로 인정받는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무리 짓기’가 세상의 폐해나 모순의 근원인 양 비판하는 일은 그래서 꼼짝없이 불편한 진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치적 세(勢)를 불리기 위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집단의 힘을 키우는 일은 곧 바람직스럽지 않은 파당(派黨)의 작태(作態)로 경계하고 꺼려야 할 사단(事端)이었다. 구태여 만들고 키우려면 그에 걸 맞는 기발한 까닭과 핑계가 필요했던 터였다.

이름 하여 ‘명분의 정치’는 그렇게 생겨났고 그처럼 자라났다. 이 같은 정치의식이 ‘문화’가 되고 ‘역사’로 자리 잡는 가운데 조선조 유교정치사의 기억들은 ‘당파성’을 마치 버리지 못할 폐단처럼 삶의 곳곳에 붙박는다. 그것은 곧 ‘당파(혹은 派黨)’가 ‘파쟁’의 근원이며 온갖 갈등과 알력의 출발점이라는 사고를 낳는다. 따라서 ‘무리’는 ‘싸움’의 텃밭이자 씨앗이며 정치적 불편함부터 앞세우는 여러 계파 집단들이란 생각을 부추긴다. 게다가 패덕(悖德)과 탐욕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세월의 늪 속에서 배양·숙성되었다고 보면 우리의 과거는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치’란 이유 있는 싸움의 과정이며 이를 바탕으로 한 건설적 긴장과 창조적 갈등의 연속체(a continuum)라는 당연한 사고마저 우리에겐 불식과 제거대상이 되고 만다. 그것도 허구적 명분과 실체 없는 논리의 틀에 갇혀서 말이다. 싸워야 할 힘의 단위들이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경쟁 상대의 정책적 허구와 입법 기조의 모순을 공박·극복하는 대신 ‘대권(大權)’과 ‘공직(公職)’을 추구하는 표의 포로가 되는 동안 유교 질서에 착실하게 물든 ‘왕조의 자식들’은 당파의 개념을 계파로 도치·재구(再構)하는 데 성공한다.

속절없이 끊긴 역사의 흐름은 그러나 국가의 과잉성장과 복지개념의 조기 숙성을 재촉했고 정치계파의 논리적 경쟁을 차단·외면하게 만든다. 시민 사회의 성장 지체와 민중부문의 오랜 배제 역시 계파의 발호를 막거나 합리적 경쟁을 재촉하지 못한 구조적 한계로 작동한다.

서구의 대의제 민주주의와 절차적 합의의 전통을 거치지 못한 한국의 제한적 정당정치는 ‘분단구조’와 ‘지역갈등’이라는 두 개의 협곡을 성공적으로 통과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척박한 공간 곳곳에서 끝없이 갈등한다. 숱한 ‘무리’들이 내건 보이지 않는 깃발과 버리지 못할 욕망의 구호들이 난무한 해방 후 한국 현대사는 그래서 헤일 수 없는 계파의 ‘무덤’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땅의 정치사에서 둘은 이음동어였다. 서로는 서로를 가려주고 위로하는 기형의 동반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채 세기말 아련한 절망의 늪과 어정쩡한 환호의 신기루를 시나브로 건너고 있었다. 한국의 계파정치는 결국 ‘정당’이란 외피를 만만하게 걸치고 억누를 길 없는 권력 장악의 욕망과 이를 실현할 인적·물적 자원을 독점 관리하는 배타적 이기성을 바탕으로 공룡처럼 커간다.

여기서 ‘이기적’이란 형용사는 보편의 사회적 본능이나 참을 수 없는 욕망의 인프라로 누구도 부인 못할 심성의 한 요소를 차지한다. 직업정치인들이라 하여 무슨 유별난 비인간적 기준이나 엄청난 기대치를 별도로 요구하기보다 단지 일상의 시민사회를 이끌만한 수준의 모범적 도덕률을 적용하자는 바람조차 이 땅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데서 문제는 새삼스러워진다.

제아무리 명분 싸움일망정, 직업정치가 애당초 이타적 행위의 으뜸임을 부인할 길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권력쟁취를 담보하는 제도적 절차가 설령 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칼 같이 지켜야 할 대상이라 한들, ‘그들’도 인간이며 욕망의 원색성이란 개념이 차라리 솔직한 담론 세계를 이룰 것이란 생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단지 기대의 최소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들의 정치적 존재양식이란 것이 실망의 수준을 넘어 환멸과 혐오의 지평을 사정없이 헤매고 있음을 볼 때 이를 어찌 견딜 것인지가 문제의 또 다른 영역을 이룬다. 저들이 만든 법과 저들이 세운 원칙을 저들이 깨고 위반할 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떻게 삭이고 극복할 것인지가 새삼스러워진다는 얘기다.

오로지 권력의 꼭짓점을 향해 모든 걸 걸며 돌진하는 정치계파의 행각이란 신선한 피를 찾는 동물적 감각과 튼실한 고기를 갈구하는 야수적 먹이본능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차피 같이 나눌 피가 아니요 살코기도 아닐진대, 한 번의 치열한 힘겨룸으로 결판낼 싸움이라면 ‘눈치’나 ‘염치’도 의식할 동물의 세계는 애초부터 아니었던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익의 향배와 권력의 배분을 둘러싼 계파 이동에 있었다. 몸담고 있던 계파 수장이 힘을 잃거나 더 이상 의지해 봤자 기대할 가치의 최소한도 건질 가망이 희박해질 때 기꺼이 떠나고 저버리는 일탈의 행렬이 보란 듯 되풀이되는 땅 또한 ‘여기’였다. 그것을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 이들 역시 바로 ‘그들’ 뿐이었다.

그것이 혼돈의 원인이요, 정치질서의 왜곡을 재촉하는 문제의 원천이었건만 이를 ‘차단·치유’할 궁극의 수단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일찍이 자발적 근대화의 경험칙(經驗則)을 뼈저리게 겪지 못한 우리의 경우, 오로지 유권자들이 도모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혁명이나 급격한 질서의 변혁을 기대한다는 것도 무망한 일이었다.

뽑아 놓고 실망하며 또 다시 배반하는 저들의 행각을 뒤로 한 채 탄식과 메마른 분노로 해소해야 할 나날들만이 4, 5년에 한번 되돌아오는 선거철과 함께 흐르고 흘렀을 뿐이었다. ‘허무’와 ‘탐욕’이란 상극의 묘비명으로 아로새겨진 한국의 계파 정치사는 따라서 정의의 논쟁과 공동선의 쟁취를 위한 치열한 정책 다툼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대신 경쟁 계파의 승리를 사전에 억제하고 적어도 ‘지연·균열’시키기 위한 허점을 찾기 위해 광분한다. 거기에 타협과 양보란 개입할 틈이 없었다. 무한 투쟁과 결사 항전, 선명성 부각과 양자택일의 호전성 강화 등이 한국 정당이 지니는 계파적 존재이유의 모두였던 셈이다.

?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