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4] ‘소이부답'(笑而不答) 김종필 ‘항명파동’ 속 공화당 당의장 복귀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표의 반란’으로 김용태 총무단이 사임하고 중도적인 김성진 총무아래 부총무에는 현오봉·김준태·구태회·김우경 등 비주류계가 들어간다. 또 비주류계인 이효상 국회의장이 사표를 내고(후에 반려) 쿠데타 주체이면서 반김(反金)계인 장경순 국회부의장은 김종필의 일체 공직사퇴를 박정희에게 건의한다. 당내 일각에서는 박정희의 공화당 총재직 사퇴도 건의한다. 김종필은 1964년 6월5일 당의장직에서 물러나 외유길에 올랐고 정구영이 당의장서리에 취임한다.

1965년에 이르자 공화당 1세대 계파 구조가 재편성된다. 주류의 계파판도가?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게 보아 공화당 주류는 이때부터 김용태 중심의 강경주류와 길재호 중심의 온건주류로 쪼개진다. 강경주류에는 예춘호·정태성·신윤창·권오석 등이 들어가고 온건주류에는 김택수·양순직·이병희·서상린 등이 포진한다. 온건주류는 비주류계의 김성곤·구태회·현오봉 등과 함께 5월동지회의 강상욱과도 제휴, 연합전선을 형성하기도 한다. 주류의 공동목표는 김종필의 당의장 복귀였고 이들은 당내 주도권 회복을 노리는 롤백 작전을 꾸준히 편다.

소강상태를 유지하던 당 내분은 1965년 12월 국회의장단과 12개 상임위원장 선거에서 또다시 폭발한다. 행정 권력에서 소외된 주류는 대신 원내 요직진출을 희망하지만 박정희는 이효상 국회의장과 장경순 국회부의장을 유임시키려 한다. 국회 투표결과, 공화당은 과거와 같은 표의 반란을 재연한다. 50여표의 조직적 반란표가 또 나온 것이다. 박정희 총재의 지명에 항거한 이른바 ‘항명파동’이다. 결국 항명주동자인 김용태·민관식은 6개월 권한정지, 김종갑·신형식에게는 경고가 결정된다.

1965년 12월27일, 공화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김종필은 또다시 당의장에 복귀한다. 새 사무총장에는 길재호가 임명되어 ‘김-길 라인’이 형성된다. 이로써 신주류가 당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김용태·예춘호·신윤창 등 구주류는 후퇴한다. 비주류의 이효상, 반김계의 장경순 등 국회의장단과 김성곤·구태회·현오봉 등 구 정치인들이 박정희의 개인적 신임을 얻자 김종필과 숙적관계에 있던 이후락 비서실장과 접근한다. 김종필의 측근인 김용태와 길재호는 서로 라이벌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모두 쿠데타 주체였지만 퍼스낼리티가 대조적이었고 성격차이는 계파운용의 부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이러한 알력은 1968년 1월25일, 김용태의 해당행위에 대한 공화당 당기위원회의 제명처분으로 일단락된다. 김용태 제명 이후 당무회의에서 김종필은 공직사퇴를 선언한다. 김종필이 사라진 뒤 공화당 관리체제는 길재호 사무총장을 축으로 삼는 구 비주류 라인으로 강화된다. 신주류 당권파는 3선 개헌을 본격 추진한 반면, 구 주류강경파는 개헌저지를 위한 서명활동에 들어간다. 그러나 1971년 총선을 앞두고 1969년의 개헌작업은 돌아설 수 없는 강줄기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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