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직 뭇별] 추수감사절 메시지…”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최근 한국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흥미로운 현상이 있습니다. 사주와 운세, 신점, 타로 이런 것들이 폭발적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20 대, 30 대가 사주와 운세, 타로에 열광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현대인들, 특히 대한민국 청년들의 삶의 불확실성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청년 뿐만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가 자녀를 결혼시키기 전에 궁합을 보고 신점을 보는 것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부모는 점집에 가고, 결혼 당사자는 타로 카페에 갑니다.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을 조금 이라도 미리 알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도 무당에게 질문하듯 물어봅니다. “하나님의 뜻이 궁금합니다.” 타로 카드를 고르듯이 성경책을 펼치고 성경 말씀을 고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궁금합니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들, 하나님께 뜻을 묻는 것들의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면 주로 어떤 것들일까요?
“할까? 말까?”, “갈까? 말까?”의 범주에 웬만한 것은 다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이 결혼 할까요? 말까요?”, “이 회사 때려칠까요? 말까요?”, “이 사업을 해야 할까요? 저 사업을 해야 할까요?” 이러한 고민을 늘 갖고 사는 것이 우리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하신 가장 명확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전 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너무 명확하고 명쾌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원했던 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답 듣자고 기도한 줄 아십니까?” 반문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응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기도하십니까? 왜 그토록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까?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다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했던 것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게 ‘성령을 소멸하고 예언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명확한 하나님의 뜻이 때로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을 ‘행위 명령’이나 ‘행동 강령’으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라’, ‘Do 명령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이 ‘할까요? 말까요?’, ‘갈까요? 말까요?’ 이런 것에 기울어져 있기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씀을 ‘행위 명령’으로 받아들이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그렇다면 장례식장에 가서도 싱글벙글 웃어야 할까요?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곁에서 나누는 일은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를 행동 강령으로 받아들이면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 등의 모든 시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시간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를 행위 명령으로만 받아들이게 되면, 타인의 불행과 고난을 보고도 감사해야 하는 괴물이 되고 맙니다. 테러로 인해 무고한 사람의 목숨이 희생당하는 뉴스를 보면서도 감사하시겠습니까? 이 명령들은 형식적으로는 ‘Do 명령문’이지만, 내용상 ‘Be 명령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안 하고’보다는 ’어떤 사람인가?’에 훨씬 관심이 많으십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과의 대화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는’ 것보다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습니다.
이번 주에 수능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제 많은 수험생들과 학부모가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학교입니까? 저 학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학생이 어느 대학에 가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그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입니다. 절망과 낙심의 상황 속에서도 삶의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 언제나 하나님과 대화를 이어갈 줄 아는 사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진로를 가지고 하나님께 묻기보다, 내가 어떤 태도로 그 직업과 진로를 선택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치과 의사를 해라”, “헤어 디자이너를 해라”, “글을 쓰는 작가가 돼라”, “가수를 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에 기쁨으로 환자를 대하는 치과 의사가 되라고 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헤어 디자이너이기를 원하십니다. 늘 기도하는 마음을 노래할 줄 아는 가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의 조건을 나에게서만 찾으면 별로 기뻐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자(롬 12:15)로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타인의 기쁨에 참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기쁨에 참여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 잘되는 것이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누군가 좀 잘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흠을 찾아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오늘날 이 사회 전체가 시기와 질투를 은근히 조장하는 방향으로 슬금슬금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축하하고, 속으로는 질투하는 삶의 태도를 매일같이 주입당하며 삽니다. SNS 와 미디어가 주사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주사기를 날마다 우리의 영혼에 꽂은 결과, 사회 전체가 멍이 들어버렸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렸습니다. 비교의식에서 생기는 분노가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나 가득 차 있습니까? 다들 불만이고 화가 나 있습니다. 감사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부러움과 결핍감 때문에 뭘 손에 쥐어도 감사가 없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신앙인들의 기도도 오염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없고 남에게는 있는 그것, 그것 제발 좀 달라는 내용으로 우리의 기도 제목이 가득 차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감사가 회복되는 시간이기를 원합니다. 감사와 기도와 기쁨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사를 잃으면 기쁨도 잃고, 기도도 망가집니다. 기도가 회복되면 감사할 줄 아는 지혜와 기뻐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Thanksgiving 이 Pray-giving 과 Joy-giving 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카 전서 5:18~19절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시 말고 성령의 소멸과 예언의 멸시는 한 세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란 앞날을 알아맞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멸시하면서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성령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할 때 음성이 들리고, 어떤 환상을 보면 성령 충만일까요? 찬양할 때,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고 손을 번쩍번쩍 들면 성령 충만일까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곧 말씀 충만입니다. 말씀을 경시한다면, 성경을 멀리한다면 우리는 성령으로부터도 멀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멀리하는 것은 우리 안의 성령을 소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소멸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님이 소멸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인격적이라는 것은 상대의 결정과 태도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강압적이지 않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강제로 끌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을 인정하지 않으면, 말씀을 멸시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떠나가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그런데 이 집에서 우리가 성령을 쫓아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이 성전을 떠나버리셨습니다. 도저히 거주하기 힘드셨기 때문입니다.
렘 7: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겔 8: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겔 8:6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집에 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저히 견디다 못해 성전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늘 거하고 싶어 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을 위해 사도 바울이 21, 22 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 어렵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새 생명을 우리가 품게 된 것입니다. 임신하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임신한 여성이 어떤 것을 먹습니까? 모든 음식을 가려 먹습니다. 뱃속의 아기를 위해 말도 가려 듣고, 말할 때도 가려 말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합니다. 그리고 나쁜 것은 가까이하지도 않습니다. 모양이라도 버립니다. 술, 담배는 물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지도 않습니다. X-ray
방사선이 자기 몸에 비추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할까요? 내 안에 잉태된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내 안의 성령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열여섯 분의 형제자매님들이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와 같은 말씀입니다. 혹시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을 때, 이 말씀으로 돌아와서 방향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매일매일 이 말씀을 통해 날마다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실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은 우리의 영적 생명 현상에 반드시 유지되어야 하는 항상성입니다. 항상성은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체온은 항상 36.5 도를 유지하고, 심장은 일정한 속도로 쉬지 않고 뛰고, 우리의 코는 끊임없이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심장이 늘 뛰는 것처럼 우리 삶에 가슴 뛰는 기쁨이 늘 있다는 것, 내 영혼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단 한 번도 멈춰 본 적이 없는 호흡처럼, 우리가 살아 있다면 항상 하나님의 대화가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또한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는 온기가 있는 것처럼, 감사란 우리 영혼의 온기입니다. 감사하는 만큼 따뜻해지는 것입니다. 감사를 잃으면 인생이 추워집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영적인 항상성을 늘 유지하며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