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1] 강경파 김영삼, 정치적 스승 ‘온건파 유진산’에 맞서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온갖 계파들이 치열하게 충돌할 망정, 독자계보를 튼실히 지탱하려면 정치자금과 인간적 아량(혹은 매력)은 절대 필요한 변수들이다. 이를 반증해주는 대표사례가 신도환과 이기택이다. 신도환은 국회에 들어오자 그의 독특한 보스기질을 발휘, 여러 계보의 동지들을 규합함으로써 독자파벌을 형성하는 수장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 산하에 포섭된 사람이 이기택이다. 이기택은 신도환의 영향 아래 정치적으로 학습·성장하여 1979년 5·30전당대회에서 일약 자기계보를 규합하고 교묘한 막후 흥정을 거쳐 부총재 자리를 따낸다.

당권 장악을 노리는 신민당내 계보는 이처럼 6개의 크고 작은 무리를 형성하면서 각자 당내 세력을 동원·규합하기 위해 온갖 전략을 구사한다.

신민당내 계파들은 1972년 전당대회를 향해 치열하게 다툰다. 보스들은 당수직과 대통령 후보를 겨냥하면서 타 계보와 빈번히 접촉, 연합전선을 구축한다. 당시의 이 같은 신민당 계파정치는 한국야당사에서 그 절정을 이룬 것으로 기록된다.

김영삼의 정치적 스승 유진산
김영삼의 정치적 스승 유진산

72년 9월26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유진산·고흥문·김영삼·이철승 등이 이끄는 구주류계와 김홍일계 일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유진산을 당수로 선출한다. 유진산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에 당대표 변경신청을 제출하는 한편 반(反)진산세력은 김홍일계·김대중계·양일동계 대의원들을 중심으로 27일 낮 별도로 모여 전당대회를 열고 전날 전당대회는 불법무효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신민당은 둘로 쪼개진다. 김홍일은 당대표위원 이름으로 27일 오전 유진산을 상대로 ‘정당대표위원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제출한다. 중앙선관위는 다음날 낮 전체회의를 열어 유진산을 신민당 새 당수로 결정하도록 한 ‘신민당대표자 변경등록신청서’를 수리·의결하고 이를 공고한다.

잃었던 당권을 되찾은 유진산은 이제 온건노선으로 신민당을 이끌며 강경노선으로 응수하는 김영삼의 도전을 받는다. 당시 신민당 지도체제는 유진산 아래 김영삼을 포함한 5인의 부총재가 있었고 이민우 원내총무와 이철승 국회부의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부는 1974년 1월8일 오후 5시, 긴급조치 1·2호를 발동, 개헌논의보도를 금지한다. 진산은 계속 협상에 의한 온건노선을 지속하던 중 건강이 악화, 입원했으나 4월28일 사망한다.

유진산이 사망하자 강경파의 김영삼이 뒤를 잇는다. 이철승은 온건파로 비주류 연합세를 형성해 한때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으로 당권을 장악하지만 김영삼을 이기진 못한다. 이같은 야권계파의 재생산구조는 민주당계 정치인들의 몸부림이 구체화한 결과다. 계파의 유전(流轉)이 계속되는 동안, 구 한민당의 정통성은 사라져갔고 추악한 상처만 남는다.

유진산 없는 신민당의 헤게모니 쟁탈은 김영삼에게 추호의 양보도 허락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국 김영삼·고흥문·정해영 등 세 부총재와 이철승 국회부의장이 당권경쟁에 나선다. 이들의 치열한 접전 끝에 전당대회는 3차 투표에서 최종경쟁자로 남은 김의택이 사퇴함으로써 김영삼이 새 총재로 선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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