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19] 김영삼의 정치적 스승 유진산, ‘사쿠라’ 비난받으며 야권 주도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박정희의 18년 집권은 한국정치 파행의 당연한 결과였다. 아울러 그 이후 드러난 여러 정치사회적 모순의 토대이기도 하다. 박정희 통치기 동안 한국은 권위주의체제와 민주투쟁을 본격 체험하고 개발독재의 후유증을 앓는다. 그 가운데 정치지배구조의 변화는 오늘의 한국계파정치 판도를 결정하는 독립변수가 된다. 5·16 이전의 정치변동이 주로 권위주의독재와 자유민주주의의 이상 사이에 나타난 갈등의 결과였다면 그 이후는 자본주의 산업화의 모순이 겹치고 기존 계파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물리는 혼미한 모습을 보인다.

5·16 이후 한국계파정치는 크게 두 가지 변화를 보인다. 우선 현대사 최초로 군부계파가 형성된다. 다음으로는 구 민주당세력을 포함한 과거 계파들이 끈질기게 성장함으로써 전통야당의 새로운 재생산구조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통 야당 계파들이 5·16을 전후하여 어떻게 전열을 재정비하는지 그 지도부터 먼저 그려보자.

민주당의 신·구파 대결은 결국 구파의 신당 창당으로 발전한다. 양 계파의 갈등을 수습하지 못한 구파 원로들은 한민당과 민국당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명분 아래 윤보선·김도연·유진산을 중심으로 재결집하고 이들은 3공 내에서 전통야당의 또 다른 원형을 만들어낸다. 이들은 4·19 이후 치열한 파쟁 속에서도 구파 동지로 줄곧 같은 입장에 서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신민당(新民黨)을 결성, 야당으로 변신한다. 2공의 대통령과 구파 원로 2인이 합작하여 만든 새로운 야당의 출현 그것은 박정희 집권 18년의 이면사(裏面史)를 형성하는 또 다른 정치적 신호탄이었다. 아울러 애써 구축한 의원내각제가 쓰러지고 ‘공화-신민’ 양당제와 새로운 계파의 난립을 예고하는 서곡이었다.

5·16 이후 정치활동재개가 허용되자 구 한민당계 동지들이었던 김병로·이인·김도연·윤보선·전진한·유진산 등은 민정당(民政黨) 창당에 힘을 쏟는다. 그러나 곧 이어 당내 주도권을 놓고 김도연과 유진산은 암투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김준연은 김재춘 중앙정보부장이 주도한 범국민당에 소선규와 함께 참여한다. 아울러 야당통합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은‘국민의 당’ 창당을 북돋고 김병로·윤보선·김도연·유진산 등 민정계와 허정·이범석 등이 모여 대통령 후보문제를 논의한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는 결렬되고 허정을 중심으로 한 비민정계만으로 ‘국민의 당’이 등록된다. 민정당도 창당등록을 하고 윤보선이 대통령후보로 추대되자 한때 후보설이 있던 김도연을 비롯해 김병로·이인이 탈당한다. 유진산도 이때부터 윤보선과 상극관계가 된다. 김도연은 범국민당 후신인 자민당(自民黨)으로 옮겨가 김준연·서민호와 당적을 같이 한다.

그 후 민정당과 자민당이 통합함으로써 김도연은 윤보선과 다시 합류한다. 그러나 민정당이 민주당과 통합하여 민중당으로 변신, 단일야당으로 통합 발족하자 윤보선·김도연·유진산·허정 등 구 한민당 동지들은 또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민중당에서 윤보선은 민정계 주류, 유진산은 비주류 입장에서 서로 경합하는 계파 보스가 된다.

그러나 한일협정 비준파동을 계기로 윤보선은 김도연과 함께 강경파를 이끌고 다시 민중당을 탈당, 신한당(新韓黨)을 결성한다. 유진산은 윤보선이 사라진 민중당에 그대로 남아 민주계 주류의 박순천과 합세하여 주류 계파를 확장한다. 한편 김준연은 민정계 속의 구 자민계 보스로 진산계 산하에 들어가 민중당 고문이 된다. 또 다시 야당통합이 시도되고 신민당이 발족하자 김준연·전진한이 각각 이탈, 군소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다.

5·16 이후 1960년대 한국 야권의 계파정치가 다다르는 기착지는 결국 신민당이었다. 민주당 잔여파벌들이 보인 헤게모니 쟁탈과정은 결국 신민당이란 거대 야당세에 모두 흡수 통합된다. 따라서 국민의 당이나 민정당, 그리고 자민당이나 민중당, 신한당이란 단명(短命) 정당들을 해부하기보다 신민당 계보를 파악하는 일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신민당 계파구조를 들여다 볼 때 유진산은 매우 중요하다. 그는 2공 민주당 정권 탄생부터 3공에서 윤보선과 대립할 때까지 굵은 발자취를 남긴다. 야당사의 큰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그는 막후실력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런 만큼 그에겐 영광보다 비판의 소리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진오가 당권을 장악하자 유진산은 명실상부한 야당의 제1실력자로 부상한다. 당내 기반이 없는 유진오가 유진산계를 발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비록 유진산은 당의 얼굴이 되진 않았지만 신민당내 주도 계파 보스로 유진오에게 큰 힘을 미친다. 신민당은 1967년 2월7일 창당대회에서 ‘한민당→민국당→민주당→민정당→민중당’으로 이어진 전통의 정강정책을 채택한다. 한민당 시절 2대 전통인 ‘반공’과 ‘반독재’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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