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50년-‘병합’조약의 합법성 논쟁①] “논쟁 출발점은 을사늑약”

[아시아엔=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2015년 8월 14일 ‘종전 70년’ 담화에서 ‘한국병합은 합법’이란 속내를 감추지 않았던 아베를 비롯한 일본 우익들이, 요즘 동해를 건너 국정화 논란에 휩싸인 한국을 바라보며 어떤 기운을 느낄까? 다음날 한국의 대통령이 올해 8월 15일 ‘건국 67년’이라고 하며 1948년 8월 15일이 정부수립이 아니고 건국절이라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주장에 이들은 아마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지 않을까?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절이면 그것은, 50년 전 한일협정 당시의 일본 측 주장, 즉 “병합은 합법이었고 1948년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여 독립국이 됐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협정에서 매듭짓지 못함으로써 빚어진 한일간 역사문제가 향후 한일 우익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식의 비약을 할지 나아가 최근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 편승한 일본의 군비강화와 더욱 밀착된 미일관계(‘신미일동맹’)가 ‘탈식민’을 통해 평화와 공존을 지향해온 동아시아에 퇴행의 역사를 가져오지 않을지 주변의 우려가 깊다. 이런 우려의 이면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에 면죄부를 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자리하고 있다.

1952년 시작된 한일회담 이래 정치적·민족적 감정이 지배해 왔던 한일간 역사문제의 최대 쟁점은 한국병합의 합법성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1990년대 들면서 한일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본격적인 학술논쟁으로 발전해 왔다. 이런 학술적 성과와 주변의 비판에 의해 그동안 ‘합법론’을 주장했던 일본정부의 입장은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유효부당론’(또는 합법부당론)의 입장으로 한발 진전되었다. 아베 역시 ‘과거형’이지만 지난 정권의 역사인식을 계승하겠다고 하여 표면적으로는 같은 입장에 있다.

한국병합과 관련한 논쟁은 한국의 ‘불법론’(또는 무효론)과 1995년 무라야마 담화 이후 ‘합법론’에서 ‘유효부당론’으로 돌아선 일본의 입장이 맞서고 있다. 논쟁의 핵심 쟁점은 한국병합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당시 국제법에서 유·무효한가 하는 것으로 하나는 국가 대표자에 대한 강박 여부이고, 다른 하나는 조약 체결 과정상의 절차와 형식상의 하자 문제다.

한편 학계의 다른 한편에서는 이 논쟁에 대한 여러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병합이 합법이든 불법이든 식민지 지배 자체가 불법이라는 관점에서 논쟁 자체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의견에서부터 이 논쟁이 법적 형식 논리에 치우친 나머지 진작 중요한 식민지주의 청산과 과정상의 불법 문제 등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 논쟁의 기준인 당시 국제법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을 합법화한 것이기 때문에 이의 적용에 문제가 있다며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한 지적도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병합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한 이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부득이한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논쟁의 결과에 따라서는 한일협정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물론 역사문제로 고조된 동아시아의 갈등과 긴장을 극복할 수 있는 출발점이란 실천적 의미도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먼저 국제법과 관련한 병합조약의 합법성 논쟁의 성과를 정리하고, 이어서 병합늑약의 절차와 형식상의 하자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사실 이 논쟁의 출발점은 을사늑약이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불법이면 이후 한국병합과 관련하여 체결된 모든 조약이 불법이기 때문에 1910년 병합늑약도 불법이라는 관점에서 논쟁이 전개되었다. 최근 병합늑약 역시 절차와 형식상의 결점이 확인되고 본격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졌지만, 불법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어 여기서 본격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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