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50주년 포럼②송철원] 日 수상관저에서 쫓기듯 조인···63세대 ‘박정희 정권’ 퇴진 앞장

Berlin (West) Staatsbesuch Korea, General Park Ankunft: Flughafen Tempelhof (rechts: Willy Brandt)

[아시아엔=송철원 (사)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 금년 6월 22일은 한국 측 수석대표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과 일본 측 수석대표 시나(椎名) 외상이 서명함으로써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된 지 꼭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온 국민들이 “굴욕적”이라고 규정하고 반대에 떨쳐나선 한일협정 조인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었는지는, 11월 2일 한일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일본 아베(安倍) 총리가 후지TV에 출연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기본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못 박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1965년의 한일협정 조인이 대한민국에서가 아닌 일본 수상 관저에서 쫓기듯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반대의 정도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1965년의 한일협정 조인 및 비준 반대운동에서 비롯되어 박정희 정권 퇴진을 주장하기까지에 이른 6.3학생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당시 상황을 잠시 되돌아보고자 한다.

6.3학생민주화운동은 이처럼 1964년부터 1965년까지 2년간에 걸쳐 벌어진 한일협정 반대 및 반독재투쟁이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힘을 합쳐 시작한 한일회담반대운동은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박정희가 주창한 이른바 민족적민주주의를 장사지낸 ‘민족적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름으로써 본격적으로 박정희 정권 퇴진운동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후 학생들의 격렬한 투쟁이 계속되어 1964년 5월 27일 전남대 학생들이 최초로 “박정희 정권 하야” 구호를 외치고, 이어서 6월 2일 고려대생들이 “주관적인 애국충정은 객관적인 망국행위임을 직시하고 박 정권은 하야하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박정희 정권 퇴진을 직설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이에 당황한 박 정권은 6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을 내란죄로 검거, 투옥하였다. 학생들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건국대생 이윤식(李允植)이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으나 이 일은 계엄 하에서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러나 학생들의 투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65년 2월 28일 동국대생들이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이등박문 망령성토 학생대회’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학생들은 격렬한 투쟁에 돌입하여 급기야 4월 13일에는 동국대생 김중배(金仲培)가 경찰봉에 맞고 또 다시 사망하였다. 이후 6월 14일 서울대 법대생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등 한일협정 조인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허망하게도 6월 22일 조인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일협정 조인 후에도 학생들은 한일협정조인 무효화 투쟁에 돌입하였으나 1965년 8월 11일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되기에 이른다. 이에 분노한 학생들은 또다시 한일협정비준 무효화투쟁에 격렬히 나서자 박 정권은 8월 26일 위수령을 선포하고 고려대에 무장군인을 투입하는 등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여 이들을 검거한다.

학생들은 위수령이 발동되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8월 27일 고려대에 모여 ‘학원방위 학생총궐기대회’를 열어 ‘학원방위’를 선언한다. 그러나 군대를 동원한 박 정권에 의해 수많은 학생들이 검거되고 결국 그해 9월 서울대생 6명이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투옥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학생 2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간 채 막을 내린 2년간의 투쟁은 이후 민주화운동의 씨앗이 됐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18년 5개월 10일간의 기나긴 박정희 정권은 독선, 부패, 탄압으로 얼룩진 채 막을 내리고, 한일협정 조인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만이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폐해의 실태를 규명하여 원만한 한일관계의 정립을 위한 초석이 마련돼야 한다. 또한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역사는 왜곡하려는 시도를 무너뜨리는 단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독재에 부대끼며 살아남은 우리가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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