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왜곡’ 일본 전유물 아니다···뿌리깊은 중국의 ‘역사침탈’
[아시아엔=김국헌 국방부 정책기획관] 2000년 9월 남북국방장관 회담에서 조성태 국방장관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과 제주에서 회담한 것은 판문점이 아닌 자리에서 남과 북의 군인들이 처음 대좌했다는 점에서 특이하였다.
김일철은 해군사령관 출신으로 오랜 동안 무력부장이었는데 이는 공군사령관 출신 조명록이 무력부장을 지낸 것과 유사하다. 회의 중 졸고 말대꾸를 했다고 처형된 현영철과 같은 소식이 김일철에 대해서는 아직 들리지 않은 것을 보면 김정은도 김일철은 원로로서 대우하여 와석종신(臥席終身)토록 하는 모양이다.
실무대표는 류영철이었는데 회담 전 제주도를 함께 관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에서 왔다고 해서 공산주의 이론과 북한 현실을 가지고 논쟁할 계제(階梯)가 아니었다. 6·15남북정상회담의 후속으로 군사적으로 협조할 사안들을 협상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대화 중 서로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접근이 오갔다. 류영철에게 베트남의 호치민 묘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러시아 주재 무관을 지낸 노승일 대좌가 레닌 묘는 가봤겠지만 류영철에게 호치민 묘는 금시초문(今時初聞)일 것이 분명했다. 북한이 러시아인을 불러 김일성의 미라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막대한 돈을 쓴다고 들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등소평은 죽어서도 모택동 옆에서 시봉(侍奉)하는 것이 싫어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중공에서 모택동 없는 등소평은 생각하기 어렵지만,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없었더라면 모택동도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류영철에게 말했다. 북한도 중국과 같이 개혁개방을 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외무부 북미국장 송민순이 회담에 참여한 것은 회담진행을 외무부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미국을 고려한 조성태 장관의 배려도 있었다. 안보정책과장을 지낸 송민순은 조성태 장관의 요청으로 국방부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김대중은 삼별초가 몽고에 끈질기게 항거한 것에서 고려가 외적에 항거한 본보기로 들었다. 수천년 역사에서 한국이 외적에 독립을 잃은 것은 1910년 일본에 강점된 것을 제외하고는 이때가 유일하였다. 고려는 98년 간 세계를 유린한 몽고의 침략을 받고서도 굳게 대항하였다. 고려가 몽고에 복속한 후 부마국(駙馬國)이 되었지만 왕실이 유지된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漢族의 나라 宋은 여진족의 나라 金에 유린되어 휘종과 흠종이 포로가 되었다. 송은 이들을 위해 해마다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쳐야 했다. 南宋은 결국 몽고에 나라를 잃었다. 宋에는 눈이 100개인 장수에 나라를 잃을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는데 눈이 100개인 사람이 어디 있냐고 방비를 소홀히 했던 송은 결국 몽고 장수 바얀(伯?)에 망했다. 伯?이나 百眼은 발음이 같다. 그런데 중국은 宋과 元을 같이 중국사에 포함시킨다. 소위 ‘24사’는 이렇게 하여 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중국사가 아니라 동양사이며, 세계사로 볼 수도 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淸을 포함한 ‘25史’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중화민국에서도 없던 일이다. 시진핑이 트럼프에 “한국은 중국의 한 부분이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유치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중국의 역사침탈은 <史記>를 지은 司馬遷 이래 유래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