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50년-‘병합’조약의 합법성 논쟁④] 병합늑약의 형식상 4가지 ‘하자’

[아시아엔=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병합늑약의 체결 절차와 형식상 하자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현재 한국과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는 병합늑약 관련 공문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산재된 자료이지만 이들 자료에는 불법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동안 을사늑약 등의 불법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으나 병합늑약의 불법 문제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자료 발굴과 병합늑약 자체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이런 ‘불법의 흔적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여기서는 논쟁이 되고 있는 형식상의 하자들을 중심으로 정리 소개하고 한다.

1)필체가 같은 병합관련 4개문서

병합늑약이 체결된 8월 22일 당일 한국과 일본에서 작성된 문서는 4개이다.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한 전권위임장(‘통치권양여에 관한 조칙’), 양국 전권위원이 서명한 병합늑약 한국본과 일본본 그리고 양국 황제가 동시에 조칙을 통해 병합을 공포한다는 각서(‘韓國合倂條約 및 兩國皇帝詔勅의 公布에 關한 覺書’)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 문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문서 형식상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두 가지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현상은 병합늑약 한국본과 일본본의 종이 질과 묶음 형식이 똑같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본의 경우, 이전 조약문은 외부 또는 의정부 등 주무 관서명을 인쇄한 판심이 있는 공용지인 한지를 사용했다. 반면 일본은 ‘재한일본공사관’이란 판심이 찍힌 서양식 펄프 용지에 청색 내지 백색의 비단 끈을 이용해서 묶었다. 그런데 병합늑약의 경우 한국본도 서양식 펄프용지에 백색 비단 끈을 사용했고 봉인 형태도 일본본과 똑같다. 이것은 한국정부가 작성해야 할 조약문을 일본이 작성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두 번째 현상, 즉 4개문서의 필체가 동일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4개문서의 필체가 똑같다는 것은 한 눈에도 알 수 있지만 4개문서의 글자 가운데 비교가 쉬운 동일한 글자 ‘韓國皇帝’, ‘日本國 皇帝’, ‘東洋平和’, ‘倂合條約’을 따로 분리하여 겹쳐 비교해 보면, 놀랍게도 모두 한 사람의 필체이다. 그 필체의 주인공은 당시 통감부 통역관이자 한국의 서지, 언어, 문학 등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고를 남겼고 특히 한글 고어에 관해서는 일본학자들 사이에 ‘달필’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였다.

정상적 과정이라면 4개문서 가운데 이완용의 전권위임장과 병합늑약 한국본은 당연히 한국정부에서 작성해야 한다. 더구나 전권위임장은 8월 18일 데라우치가 이완용을 두 번째 만났을 때 준 것으로 일본이 사전에 작성한 것이다. 이 두 가지 현상은 곧 한국정부가 작성하고 최종적으로 순종이 재가할 당연한 권리를 일본이 박탈한 것이다. 아직까지 이에 대한 ‘유효부당론’의 반론이나 반응은 없다.

2)데라우치의 자격 문제

병합늑약의 전문에는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일본 황제폐하는 통감인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고 했다. 여기서 쟁점은 과연 통감인 데라우치가 일본정부를 대신할 전권위원의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을사늑약 제3조에 “일본국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둔다.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한다고 했다. 즉 통감은 한국의 외교권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정부를 대신하여 파견된 한국황제의 신하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본정부의 전권위원이 아니라 한국정부의 전권위원이 되어야 했다.

이에 대해 운노는 1910년 12월 20일 공포한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에서 “통감은 한국정부를 대표”한다고 하여 통감은 한국에서 일본정부를 대표하는 외교관이기 때문에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또한 을사늑약 이후 맺은 여러 조약 즉 정미조약이나 각서 등에서 이미 통감과 한국의 내각총리가 서명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서명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자격자인 한국의 내각총리대신이 서명자로 나선 데는 러일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경우 한국정부와 합의한 위에 그것을 집행한다’는 러시아와의 약속 때문이라고 했다.

운노는 또 8월 22일 어전회의가 끝난 뒤 통감관저로 간 이완용이 통감에게 전권위임장을 사열(査閱)받은 것과 관련하여 “데라우치는 제시하지 않고 한국의 일방적인 제시였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데라우치의 전권위임 임명에 대해서는 “22일에 특히 추밀원회의를 열고 동원의 자문을 거친 위에 곧바로 재가를 하시고, 데라우치 통감에 대해 조약조인에 필요한 전권을 부여하셨다”는 당시 병합준비를 주도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츠 미도리(小松綠)의 증언으로 입장을 대신했다.

운노의 주장대로 한국외교권을 일본정부가 행사한다고 한 을사늑약 제1·2조에 따르면 한국정부를 대신하여 기명날인할 자격은 일본외무성 즉 외부대신에게 있어, 병합늑약은 한국정부를 대표한 일본 외무대신과 일본정부의 또 다른 전권위원이 기명날인해야 되는 것이다. 이처럼 통감 데라우치는 어느 경우에도 일본정부의 전권위원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데라우치의 전권위임장과 관련해서도 고마츠의 사후 증언만 있을 뿐 데라우치의 전권위임장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어느 경우이든 데라우치는 무자격자이며 그런 무자격자가 병합늑약에 기명날인한 것이기 때문에 병합늑약은 성립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무효인 것이다.

3)‘날조’된 ‘병합칙유’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조약을 조인한 후 데라우치의 갑작스런 제안으로 ‘병합조약과 양국 황제의 조칙을 동시에 공포하고 이를 위해 어느 때라도 가능하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는 각서를 썼다. 그리고 8월 29일 11시 한일 양국 황제가 동시에 병합을 공포했다.

데라우치는 8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본국에 최종 수정된 순종황제의 조칙문을 보내면서 “오늘(27일-필자) 재가를 거쳐 29일 병합조약과 함께 발표케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29일 공포된 것은 ‘조칙’이 아닌 ‘칙유’였다. 원래 ‘조칙’이었던 것이 갑자기 ‘칙유’로 둔갑한 것도 이상하지만 공포된 ‘칙유’의 양식은 더욱 이상했다. 8월 29일 공포된 순종황제의 ‘병합칙유’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라는 어새가 찍혀있다. 주로 행정용 문서에 사용되던 이 어새는 정미조약 체결 당시 통감부에서 탈취해 간 것이었다. 이는 곧 통감부가 ‘병합칙유’를 재가한 것이니 한마디로 날조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병합칙유’의 문서 양식이다. 조칙 또는 조서는 황제의 명령을 기록한 것이고 칙유는 황제의 훈유(訓諭)를 널리 백성에게 알리는 글로써 각각 그 격식과 쓰임새가 다르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나 정미조약 직후인 1907년 9월 18일의 「유십삼도대소민인등(諭十三道大小民人等) 」의 칙유를 보면, 어새의 위치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 ‘어새+년월일+주무대신 부서(직명+이름)’의 형식이다. 그런데 1907년 11월 일본은 한국정부의 문서도 일본식 공문서 양식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그래서 다른 문서와 함께 칙유의 문서양식도 바뀌었다. 예컨대 1907년 11월 18일 순종의 ‘유신국시칙유’(維新國是勅諭)를 보면, 앞 시기와는 달리 ‘년월일+어명(親書)+어새(칙명지보)+주무대신 부서’의 형식이다. 이것은 8월 29일 공포된 일본황제의 ‘병합조서’의 양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병합칙유’가 ‘날조’된 것이 아니라면 그 양식도 일본황제의 ‘병합조서’와 동일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병합칙유’는 대한제국의 칙유 양식도 아니고 일본의 공문서식을 따른 것도 아닌 완전 ‘돌연변이’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돌연변이’가 나왔을까? 그 이유는 8월 27일 데라우치가 본국에 보낸 전문에서 짐작할 수 있다. 데라우치는 이 전문에서 “한제(韓帝)의 조칙문(詔勅文)”을 “이날 재가를 받겠다”고 했다. 데라우치는 ‘한국병합시말’에서 순종은 당시 상황에 대해 “대세가 이미 정해진 이상 속히 실행하는 것이 좋다”고 했고,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도 조약안에 대해 “일일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재가(嘉納裁可)”했다고 했다.

이 보고가 사실이라면 순종이 27일의 병합조칙을 재가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조칙’이 공포 당일 ‘칙유’로 돌변한 이유는 27일 순종의 재가를 받지 못한 때문인 것이다. 결국 데라우치는 공포일이 다가오면서 어쩔 수 없이 급히 자신들이 쓴 칙유에 자신들이 소유한 어새를 찍어 공포했던 것이다.

운노는 이에 대해 8월 27일 데라우치의 수정된 조칙문을 근거로 이 칙유가 한국 궁내부와 통감부의 쌍방 타협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조칙’이 ‘칙유’로 변한 것은 일본의 공문식에 ‘칙유’ 형식이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원래 공포하기로 한 것이 ‘조칙’이고 일본의 공문식에 그 형식이 특정되어 있는데 굳이 특정되지 않는 ‘칙유’를 선택했다는 운노의 주장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또한 운노는 ‘병합칙유’와 같은 시기 다른 ‘칙유’와의 비교를 주장했는데 앞서 확인했듯이 ‘병합칙유’는 완전 ‘돌연변이’였다. ‘날조’가 아니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4)‘비준서’를 대신한 병합칙유와 ‘사전승인설’

병합늑약에는 조약 체결의 마지막 단계이자 조약 효력의 발생을 뜻하는 비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일본 측은 이완용의 전권위임장과 병합늑약 제8조에 병합은 양국 황제의 재가를 거쳤다는 ‘사전승인항’이 있기 때문에 비준서가 필요 없다고 했다.

당시 국제조약 가운데 ‘사전승인항’을 둔 사례가 있는지도 궁금하지만 이를 근거로 비준의 필요가 없었는지도 의문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데라우치가 8월 22일 뜬금없이 양국 황제의 병합조칙을 동시에 공포하기로 한 각서를 요구한데서 찾을 수 있다.

일본정부는 1909년 7월 6일 병합 방침을 공식 결정한 후 필요한 세부방침을 정하면서 일본황제의 조칙선포를 결정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병합이 부득이한 이유를 대내외적으로 알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합 후 식민통치의 대방침으로 천황의 대권에 의해 한국을 통치하되 제국헌법을 한국에는 시행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방침은 1910년 7월 23일 데라우치가 한국에 제3대 통감으로 부임하기까지 변함이 없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황제도 병합조칙을 공포한다는 방침을 한번도 언급은 물론 결정한 바 없었다. 이것은 8월 22일 병합늑약을 조인한 뒤 데라우치가 고무라에게 병합조약과 “관련된 조칙은 양쪽이 동시에 공포하기로 했다”고 처음 보고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럼 데라우치는 병합방침에도 없던 각서를 왜 갑자기 준비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8월 17일 ‘사전승인’을 규정한 조약안 제8조의 수정안에 대한 고무라의 의견에서 짐작할 수 있다. 고무라는 사전승인 조항인 제8조에 대해 “조약은 전권 위임을 가지지 않고 조인된 것 같은 형식으로 된다”고 하며 병합 공포 전에 각국에 조인이 끝난 조약을 통지하는 관계상 한일 “양국 황제의 재가를 거친 것인지, 조약 면에서 명료하게 되어 있지 않으면 불편이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고무라는 ‘사전승인’에도 불구하고 병합 사실을 통보할 영국, 미국 등 서구 열강 등을 의식하여 양국 황제의 재가 즉 비준의 불명확성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데라우치는 부랴부랴 비준서에 준하는 형식으로 한국황제의 병합조칙 공포를 갑자기 결정했던 것이다.

운노는 이에 대해 8월 22일 각서에는 비준서를 대신하여 조칙을 발포한다고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추측에 불과하고 또한 칙유가 비준서의 의미를 갖으려면 어새가 아닌 국새를 사용해야 했고 따라서 이 칙유는 병합에 즈음한 국민에 대한 황제의 유지로서 연출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운노의 이같은 주장은 앞서 제기한 ‘병합칙유’의 ‘날조’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한 설득력있는 재반론이 제기될 때만 재검토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전승인’이 비준 행위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8월 29일 일본 황제가 왜 조약을 재가 즉 비준했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답해야 한다.

이밖에도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8월 18일 내각회의에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뿐(君辱臣死)”이라며 병합에 유일하게 반대한 학부대신 이용직을 이후 내각회의와 어전회의에서 철저히 배제하는 치졸한 공작을 펼친 점 등도 병합의 불법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병합의 합법을 주장하는 ‘유효부당론’ 내지 ‘합법부당론’은 비록 ‘과정상 부당하지만 결과는 유효 내지 합법이다’는 상호 배타적 개념의 결합만큼 이들 주장과 반론은 모순과 억지투성이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병합이 순종의 ‘재가’를 받은 ‘합법’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제가 ‘거짓’임은 일제 강점기 주미한인의 대표적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 1926년 7월 8일자에 실린 순종의 유조(遺詔)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순종은 1926년 4월 붕어하기 직전 궁내대신 조정구에게 남긴 유조에서 “병합의 인준은 강린(일본-필자)이 역적의 무리와 함께 제멋대로 하여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고 모두 내가 한 바가 아니다”라고 하며 자신은 병합을 재가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혔다. 주권자로서 순종이 병합늑약 체결 당시 적극적으로 반대 내지 거부를 확실히 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비판은 면할 수 없지만, 이 유조는 순종의 병합 거부를 증명하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자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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