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50년-‘병합’조약의 합법성 논쟁③] ‘병합조약’은 ‘합의적 조약’인가?
?[아시아엔=윤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910년 11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한국총독보고 한국병합시말’(이하 ‘한국병합시말’)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병합늑약 체결 전말을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8월 13일 데라우치는 2주내 병합단행을 일본정부에 통보하고, 8월 16일 이완용을 만나 병합의 의사를 밝혔고, 8월 18일 데라우치를 다시 만난 이완용은 그의 지시에 따라 내각회의를 열고 병합 문제를 논의했다. 8월 22일 오후 2시 열린 어전회의에서 순종이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했고 이날 오후 4시 통감관저에서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병합늑약을 조인했다. 그리고 데라우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정숙 원만히 해결됐다”고 자평했다.
이 보고서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8월 16일 데라우치가 이완용을 비밀리에 불러, 병합의 일은 “혹은 위압으로써 이를 단행하거나 혹은 선언서를 공포하여 협약을 하지 않는 일도 있다”고 위협한 뒤 병합의 “형식은 합의적인 조약으로써 서로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며 ‘합의적인 조약’을 강조한 점이다. 그리고 데라우치는 ‘합의적인 조약’을 위한 조약 체결의 절차로서 이완용에게 “먼저 각의를 거친 후에 한황 폐하에게 (중략) 조약 체결을 위한 전권위원의 임명을 주청”하고 “귀대신과 본관은 그 직책상 조약 체결의 대임을 맡는다”고 강조했다.
데라우치가 제시한 ‘합의적인 조약’의 절차를 재정리하면 ‘내각회의→전권위원 주청→전권위원 임명→협상→조인’의 순이다. 이 경우 조인 뒤 당연히 양국 황제의 비준을 거쳐야 조약이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에 이 조약은 정식조약(treaty)을 의미한다. 당시 국제법에 따르면 정식조약은 ‘전권위원임명→협상→조인→비준(비준서교환)’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각각의 절차 단계는 체약국이 정한 국내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럼 이 절차가 거쳐야 할 당시 내각회의에 관한 국내법 절차를 보자. 1907년 개정된 내각관제와 내각회의규정에 따르면, 법률, 칙령 등은 “내각회의를 거친 뒤 총리대신과 주무대신이 경의상주안(經議上奏案)에 서명하고” 주청한 뒤 “재가한 안건을 어압(御押)·어새(御璽)를 검(鈐)”한 후 관보에 게재한다고 했다. 또한 1907년 강제 체결된 정미조약 제2조에 “한국 정부의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받는다”라고 하여 내각회의 안건은 한국 황제에게 상주하기에 앞서 통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조회·승인 절차가 추가되었다. 따라서 내각회의에 내각이나 주무관서에서 안건을 상정하여(請議案) 결정한 안건은 ‘통감 조회→통감승인→상주(주청)→재가→공포’의 단계를 거치도록 했다. 물론 이때 각 단계마다 그에 상응한 문서들이 작성, 보관되었다. 즉 내각회의에 안건을 상정한 경우 내각 또는 주무관청의 청의안이, 통감에게 조회·승인을 받은 조회 및 승인 문서, 재가를 받을 경우 황제에게 주청하는 안건 명과 내각 각원의 가부(可否) 등이 표기된 상주안(주본) 등이 작성되어 보관되었다. 이런 절차는 일본정부도 거의 비슷하였다.
그럼 과연 데라우치가 이완용에게 강조한 ‘합의적인 조약’ 절차가 실제 조약 체결과정에서 제대로 지켜졌을까? 일본의 경우는 데라우치가 강조한 ‘합의적인 조약’을 위한 절차 즉 정식조약을 체결하는 절차를 그대로 따른 반면, 한국은 사실상 절차를 확인할 수 없는 비정상이라는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전권위임장 및 조약안 상주 및 재가’ 와 ‘조약 재가(비준) 및 공포조서’ 절차이다. 이 두 절차는 조약의 성립 및 효력 발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절차이다.
일본측과 달리 조약의 최종 체결권자인 순종의 재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밖에도 이완용의 전권위임장이나 8월 29일 공포된 순종의 ‘병합칙유’ 역시 중간 단계인 통감의 조회·승인 절차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 전후 절차를 확인할 수 없다.
이런 절차상의 결함은 병합늑약이 체결되기 약 두 달 전에 ‘한국정부의 경찰사무를 일본정부에 위탁하는 각서’를 체결한 절차와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1910년 6월 21일 데라우치의 지시를 받은 통감부에서 22일 박제순 내각총리대리에게 각서 체결을 통보했고, 이날 박제순은 급히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이 각서에 대해 우여곡절 끝에 합의를 이룬 뒤 곧바로 창덕궁으로 가서 순종황제에게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다. 이어 23, 24일 양일간 양측이 각서 문안을 협상, 협의하여 24일 오후 8시 무렵 조인을 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25일 박제순은 다시 창덕궁으로 각서 조인 사실을 복주한 뒤 재가를 받고 26일 각서를 정식으로 교환했다. 이처럼 각서의 경우도 국내법이 정한 절차를 거쳐는 데 한 나라의 통치권을 통째로 넘기는 병합늑약에서는 이런 절차들이 모두 지켜지지 않았다.
이같이 데라우치는 ‘합의적인 조약’을 강조하면서 정식조약을 체결하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절차상 결함투성이다. 더구나 결함이 있는 곳은 모두 순종의 재가가 필요한 곳이다. 이것은 곧 이 절차에서 순종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굳이 당시의 국제법을 따지기 이전에 조약은 체결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사의 합치여야 한다”는 원칙을 위반한 것이다. 한 마디로 조약 성립의 전제가 될 ‘동의의 자유’를 박탈한 것이기 때문에 병합늑약은 처음부터 성립요건을 갖추지 못한 불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