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 파벌효시는 ‘한국민주당’ vs ‘임정파’ 대립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김대중이 민주당 신파에 뿌리를 둔다면 김영삼은 같은 당 구파에서 정치신생아로 양육된다. 흥미로운 건 당시 구파와 신파의 지역기반이 각각 호남과 영남이어서 오늘날 양김의 지역기반과 정면 배치된다는 사실이다. 한민당 본거지였던 전라도에서 정치신인 김대중이 송진우·장덕수·백관수·김준연 등 1세대가 주름잡는 정치판 안에 발 들여놓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은 조병옥과 장면으로 갈라진 민주당에서 장면이 이끄는 신파에 줄을 댄다. 마치 이철승이 신파 소장세력을 등에 업고 당내 실력자가 된 것처럼 그는 맥을 같이 한다.
한편 김영삼은 1954년 사사오입 파동 직후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최초로 변신한다. 민주당 입당 후 그는 조병옥의 정치스타일에 매료되었고 민주당 구파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어 그는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는 데 성공하며 4·19 이후 민주당 정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민주당 구파가 분당하여 만든 구 신민당 원내 부총무로 활동을 개시한다.
양김이 독자 계보를 만들어 대결하기 시작한 건 1965년 5월 유진오 당수체제를 출범시킨 구 신민당 전당대회 때부터다. 김대중은 이 때 정일형을 부총재로 추대하면서 신파의 중간보스로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그의 주변엔 인물이 없었다. 김대중은 유(兪) 당수의 지명으로 의원총회에서 신민당 원내총무로 인준되길 기대했으나 끝내 그 자리는 김영삼에게 돌아간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숙명적 파벌대결은 1970년 9월 대통령 후보지명을 위한 전당대회 때 본격화한다. 김영삼이 대권을 장악한 이후까지 이어지는 저 지난한 파벌투쟁사와 양김의 정치경쟁 서막은 이렇게 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양김을 길러내고 한국 정치파벌을 잉태한 정치원류의 모습과 그 난맥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제 해방공간에서 김영삼 정권에 이르는 계파정치의 경로를 밟아보자.
해방직후 남북한 좌우익 정치세력의 각축은 현대정치사 연구의 뜨거운 주제였다. 오늘의 계파 원류가 해방공간에서 잉태되고 분열의 시발점 역시 거기서 발견된다는 데 이론(異論)의 여지는 없다. 해방공간에서 사람들은 누가 정치공백을 메울 것인지 의아해했다. 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인지 궁금해 하는 가운데 해외 독립운동지사 대부분이 속속 귀국한다. 귀국 인사들 모두가 같은 세력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자신의 투쟁경력을 전면에 내세우며 국내기반 동원에 나선다. 해방공간은 따라서 출발부터 서로 다른 경력기반을 가진 독립운동세력들이 급속히 정치화하는 상황을 조성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도무지 뭔지 모르던 대중들에게 분단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이입을 기정화할 따름이었다.
당시 귀국인사들의 정치적 입장과 세력의 지정학을 압축해보자. 해방 직후 분단이 고착화되고 남한 헤게모니 장악과정에서 좌익세력기반이 극도로 약화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우익이 어떤 파쟁과 대결구도를 펼쳤는지 헤아리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의문을 푸는 것이 오늘의 계파정치구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최초의 계파현상은 국내파로 알려진 한국민주당 세력과 해외파로 통칭하는 임정(臨政) 귀환세력의 알력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각기 한민당과 한독당이란 외피 안에 머물며 해방공간을 달랠 이념이나 정책제시보다 건국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지를 놓고 경쟁한다. 이 과정에서 ‘김구-신익희-김성수-송진우’로 이어지는 1세대 정치인들의 갈등이 본격화한다.
한민당은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이미 축적한 자본력과 해외에서 유학한 엘리트 중심의 정치적 이니셔티브를 강화하고 있었다. 임정 귀환세력은 고국을 등지고 중국 땅에서 천신만고 독립운동을 감행한 경력을 바탕으로 세력화했고 한민당의 일제하 친일경력자의 ‘비동적(非動的)’ 정치행태를 비겁 행위로 단죄하기도 한다.
때마침 귀국한 이승만은 이들의 대결구도에 쐐기를 박는다. 게다가 한민당은 이승만의 환국을 자파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하기 위해 정치자금공세에 나선다. 정치자금이 계파운영에서 가장 대표적인 자원이란 불문율은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한민당 간부들은 자신에게 결여된 ‘건국참여’ 명분을 얻기 위해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 해외파에 대해 자금공세에 나선다. 김성수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돌아온 이승만에게 돈암장 등 거처와 ‘의식주’ 일체를 지원했고 이를 기화로 한민당과 이승만의 유대는 지속적 자금지원을 통해 일단 굳건해진다. 송진우는 송진우대로 신익희의 만류를 설득하면서 임정세력에게도 상당한 정치자금을 제공한다.
한민당과 한독당의 파쟁은 신탁통치반대와 좌우합작운동, 그리고 남북협상추진 등으로 절정에 이르나 김구 암살을 계기로 임정귀환파는 몰락한다. 이에 앞서 임정귀환파의 실력자 신익희는 이승만의 단선·단정노선에 호응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에 추대됨으로써 한독당과 인연을 끊는다. 한 소속정파의 계파를 이탈하여 타파에 합류하는 외형적 표류의 시발점은 이렇게 출발한다. 이로써 해방공간에서 남한정국을 주름잡던 해외파와 국내파의 계파대결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계파 내부의 치열한 세포분열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