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32] 이민우 세워 2·12총선 승리 양김, 87년 또 분열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신민당 3세대의 내분과 해체, 새로운 분당 조짐에 따른 일련의 정치파행사가 비극의 시발점이다. 12대 총선 후 정국의 파란은 대통령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내각책임제로 타파할 것인지 뜨겁게 달아오른다. 신민당은 102석 원내 다수의석을 확보하고 가능한 한 헤게모니를 유리하게 확보할 제도적 대안으로 대통령 직선제와 ‘호헌론’으로 여권의 의도를 차단한다. 노태우의 6·29선언이 있기 전까지 여야의 격돌은 일반대중의 정치의식을 둘로 나누고 상당수 시민들을 정치폭력현장으로 유인하는 직·간접 요인이 된다.

그러나 신민당내 사정은 미묘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과거 두번이나 야당 총재를 지낸 김영삼은 이민우를 총재로 밀고 2선으로 물러나 있었고 김대중은 입당을 거부한 채 재야와의 연대를 통해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이런 처지에서 김영삼은 양김 공동명의로 1987년 4월8일 오전 ‘민추협(民推協)’ 사무실에서 신당 창당을 발표한다. 통일민주당 창당선언이었다. 이민우 총재의 리더십 한계와 양김에 대한 정치공박, 그리고 이철승·이택희 등 신민당내 일부의원들의 내각책임제 지지주장 등 일련의 반(反) 양김 움직임은 그들을 추종하는 다수세력을 격분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은 한낱 변혁을 향한 촉진제적 사건들에 지나지 않았다. 국민들의 관심은 분명 신민당 쪽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신민당 3세대가 이를 의식해 자중하기엔 이미 늦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빨리 숙성한 신민당은 그처럼 일찍 죽어간다. 민주화를 향한 변혁의 조급심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신민당은 끝내 숨을 거둔다. 재창당 이후 끊임없이 반복된 양김의 정치적 저울질과 차기 권력구조의 예상실익에 관한 주변 계파들의 치열한 대차대조표 작성은 당내 파쟁의 골을 깊이 파놓은 훨씬 뒤의 일들이었다. 김영삼으로부터 총재로 추대된 이민우는 계파들의 계산과 파쟁 열기가 휘감아 도는 당을 수습하며 동시에 김영삼을 떠받들기엔 너무 노회한 존재였다.

이민우에 대한 치열한 반발과 김영삼·김대중에 대한 반사적 충성이 69명 의원들을 집단 탈당시킴으로써 거대야당 신민당은 붕괴위기에 휩싸인다. 신민당에 남길 희망하는 세력과 무소속으로 돌아가려는 세력까지 겹치면서 ‘분당(分黨)’과 ‘연명(延命)’의 불협화음은 13대 대선 직전 커져만 간다.

누가 나가고 누가 남았는가? 이도 저도 아닌 관망 세력들은 어떤 얼굴들이었을까? 신민당을 이탈한 양김 추종자들은 결국 보스에게로 돌아가길 희망한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도전기회를 이용할 수밖에 없던 그들은 한결같이 다시 보스의 품에 안기고 싶은 모태환귀증(母胎還歸症)에 빠져든다.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지 6개월 뒤, 결국 그와 거시협조체제를 유지하던 김대중은 신당창당으로 경쟁의 불씨를 당긴다. 1987년 11월13일,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이란 당명을 걸고 신당을 결성·공포한다.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의 3야당과 민정당과의 경쟁은 이렇듯 파행과 대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파격의 연대가 시작된 1990년 1월, 이 땅에는 사상 최초로 여야가 합당함으로써 과거로의 회귀를 모색하는 파벌의 일대 대란(大亂)이 일어난다. 구국의 결단이라며 노태우와 김영삼, 김종필이 야합하여 ‘민주자유당’을 결성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구 신민당 파벌들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3인 보스를 정점으로 하는 계파 구성원 다수는 고분고분 명령에 따랐고 평민당으로 헤쳐모인 이들을 제외한 세 무리는 민자당 지붕 밑으로 모여든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또 다시 반발·탈당하여 반대진영으로 가담하거나 표류의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3당 지도부가 합의한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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