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30] ‘5·16 주체’ 김종필, 30년 뒤 ‘새카만’ 후배 노태우 손잡고 ‘기사회생’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5공 말 전두환과의 불협화음 청산과 전두환의 친인척 비리공개 및 사법부 재판에 따른 고충, 그리고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여론재판의 후유증 등을 앞에 놓고 민정당 총재 노태우는 과거와의 완전 청산 아니면 발전적 부활을 통한 과도기 혼란과 외풍의 방어를 놓고 기로에 선다. 그에게 후자 이외의 대안은 없었다.

5공의 계파정치는 신군부 엘리트 변화를 축으로 삼아 주변에 모여든 일부 여야계보 이동만 있었을 뿐 눈에 띌 만한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6공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구조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당명은 ‘신민주공화당’으로 바꿨지만 대선에 패배한 김종필 총재는 지속적인 친여 경향을 버리지 못한다. 야당 지도자의 경직된 모습 뒤에는 반(反)민정당적 요소보다 지난 세월 겹겹이 쌓인 정치적 한을 어떻게 풀고 무슨 수로 정국을 유리하게 활용할 것인지 아련한 계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외야내여(外野內與)’적인 김종필의 행태를 감안할 때 구 공화당계를 등용한 6공 초기의 정치적 함의와 1990년 1월 민자당 통합에 따른 김종필의 행동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종필이 김대중?김영삼과 다른 점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자리까지 오르고 나락에 떨어진 구 권력자였다는 점이다. 그것은 투사의 면모와 정치적 대항논리로 철저히 무장한 양김의 퍼스낼리티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권력에 착취당하고 설움 받은 자들은 한사코 권력을 접수·쟁취함으로써 그 실체를 확인하게 마련이다. 그들은 단지 권력 그 자체만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권력을 아는 인간에게 그건 매력적이면서도 허망하며 동시에 무섭게?다가간다.

김종필 역시 다른 야권 지도자처럼 하방식(下方式) 지도체제를 사용한다. 그의 주변에는 왕년의 정치스타들 대부분이 모여든다. ‘이효상 백두진 전예용 김용태 장영순 이석제 길전식 이영근 최정기 육인수 김성철 이상희 최두고’ 등은 당고문으로 추대되고 ‘이병희 구자춘 이종근 최재구 김영자’ 등은 부총재, 당 중앙위 의장은 신철균, 정책위의장에 김용환, 사무총장 최각규, 원내총무 김용채, 중앙훈련원장 오용운, 종합기획실장 이희일, 총재 비서실장 김동근, 대변인 김문원 조용직 등의 진용을 갖춘다.

신민주공화당은 13대 총선 당시 공화당과 유정회에 속한 유신세력과 박정희 정권 당시 고위공직자 다수가 출마해 전국구 3명을 포함하여 모두 11명을 국회로 내보낸다(당선자 총 35명, 전국구 포함 원내의석 11.8% 획득). 당시 지역구에 나선 유신본당파(維新本黨派)는 김종필을 비롯, ‘이병희 구자춘 이종근’ 등이 당선되고 이밖에 ‘김용환 최각규 김용채 오용운 신오철’ 등이 지역구에 뽑힌다(전국구는 ‘이희일 옥만호 신철균’ 등). 이들은 마치 구 공화당을 부활시킨 듯 생존주자의 면모를 잃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당시 민정당의 당적을 갖고 있던 박준규 대표위원, 임방현 중앙위의장, 이승윤 정책위의장, 김윤환 원내총무, 그리고 입법부 대표로 김재순 국회의장, 홍성철 청와대 비서실장 등 또 다른 정치적 무리는 전부 구 공화당계 인물들이다. 이들 무리를 겹쳐 구 공화당 위상이 얼마나 이어지는지 살펴보려면 치밀한 추적과 분석이 필요하다. 또 이들의 정점에 서 있는 수장들 각자가 당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주목해야 할 문제로 우리 앞에 남는다.

그러나 정국의 새로운 초점으로 떠오른 문제는 민정당의 계파간 갈등과 암투였다. 역사는 종종 이변(異變)의 반복을 허락하지 않는다. 과거 미미한 권력자에 지나지 않던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변신한 뒤 5공 잔존세력은 6공의 당연한 수구파로 입지를 강화한다. 그러나 노태우는 이들 때문에 자기 측근이 커나갈 기회와 현실적 가능성을 차단할 수 없었다. 결국 과거를 이어감으로써 어제와 오늘의 존재이유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수구파의 명분과 과거의 오류는 말끔히 청산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신주류의 대항논리가 민정당 말기의 암투를 새삼 심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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