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6] 10·26서 5·17 사이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의 ‘동상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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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0·26에서 5·17까지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3김은 모두 대권을 놓고 자신들의 세를 규합하기 위해 애쓴다. 특히 김종필은 과거의 한을 달래며 못다 한 정치활동과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부심하고 양김은 양김대로 김종필과 신군부의 등장을 견제해야 할 대상으로 의식한다. 그러나 10월 유신 이후 김대중과 김영삼은 더 미묘하게 대립한다. 특히 전두환은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구속하고 이를 역이용한 김영삼은 김대중과 다른 정치세력들을 따로 키운다. 10·26 이전 두 차례에 걸친 신민당 총재역할과 YH사건, 그리고 부마사태를 통해 김영삼은 반대 급부적 지지세를 확충하는 데 성공한 반면 당권경쟁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적들도 낳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종합할 때 5·17 직전까지 원내 세력판도는 당권을 장악한 김영삼이 우세한 반면, 김대중은 재야를 등에 업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에게도 동조세력이 없었던 건 결코 아니다. 당내에는 ‘박영록·송원영·한건수·고재청·예춘호·노승환·이택돈·천명기·최성석·이필선·정대철·조세형·김원기·김영배·오홍석·김유덕·손주항·이진연·임종기·허경만·이용희·박병효’ 등 원내세력과 구 통일당의 ‘김록영·김현수’, 그리고 원외의 ‘이중재·김상현·조연하·박종률·유제연’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1980년 4·7성명을 통해 신민당 입당을 포기한다. 아마도 김영삼의 영향력과 위상을 전제할 때 기존 야당에서 자신의 운신 폭은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단일정당 내 경쟁보다 독자적 계파 보스로 변신하고픈 계산이 앞섰을 것이다.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는 대신 김대중은 정권투쟁보다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운동이 먼저란 명분을 걸고 국민과의 직접 대화방식으로 돌아선다.

하지만 이같은 제스처는 대권경쟁을 향한 전략적 우회에 불과했다. 그는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남화연구소’ 등 원외 조직거점을 넓히고 대권도전 기반마저 확충한다. 민주헌정동지회는 그의 재야 실무측근인 김종완·박종태·김윤식을 공동대표로 하고 이상돈·유청·김달수·강봉룡·조종호·양순직·김상현·김충섭·계훈제 등 9인 지도위원이 주축이었다. 한국정치문화연구소는 김상현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의 집결지로 김창환·박정훈 등이 전위역할을 하고 조연하는 남화연구소를 운영한다.

그러나 신군부의 등장을 내다보지 못했던 것처럼 의외의 현상은 되풀이된다. 유권자들 다수의 표의 반란이 나타난 것이다. 전두환에 대한 정치적 환멸과 야권에 대한 정치적 지지는 85년 2월, 12대 총선에서 이변을 낳는다. 이 선거는 5공 정당구조의 분기점이 된다. 선거 실시 불과 3주전에 창당된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은 대도시에서의 압승으로 일약 제1야당이 된다. 신민당은 기존 제1야당이던 민주한국당(민한당) 의원들을 신당에 가입하도록 유인해 민한당은 결국 와해된다. 비록 1969년 9월22일 창당, 1980년 10월27일 제8차 개헌으로 소멸·해체된 구 신민당 법통을 고스란히 승계한 정당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11년 1개월간 존속된 이 땅의 전통 제1야당의 맥이 다시 지속되고 있음을 여실히 입증한 것이다. ‘유진오→유진산→김홍일→김영삼’으로 이어지던 신민당의 예전 영향력이 12대 총선을 통해 부분 부활한 것이다. 이를 놓고 볼 때 한국 유권자들은 시민혁명의 잠재력을 몸으로 표출하기보다 ‘표(票)’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선거결과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한국국민당(20석, 7.2%)을 제외한 야권은 신한민주당으로 통합, 5공의 실험적 다수정당제가 끝나고 다시 구체제적 양당제로 복귀한다. 원내 다수야당으로 변신한 신한민주당(102석, 민주한국당계 포함) 파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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