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20] 신민당 ‘진산파동’ 후 김영삼·고흥문계와 양일동계로 ‘분열’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통합전당대회 당시 당 안에는 민정계·신한계·민주계·재야중도계·유진오 직계·구 자유당계·혁신계 등 잡다한 계파들이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5·3 대선 후 윤보선이 참패하자 그는 2선으로 물러나고 유진오가 당수를 맡는다. 그러나 유진오마저 신병치료차 1969년 10월, 일본으로 떠나자 당권은 유진산에게 넘어간다. 이른바 진산시대(珍山時代)가 열린 것이다. 1970년 1월26일, 진산이 임시전당대회에서 도전자인 비주류의 이재형을 물리치고 당수가 되자 윤보선은 장기영·조한백·이정래·장준하·신각휴·신중목 등을 이끌고 신민당을 탈당, 1971년 1월5일 대선(4월27일)을 눈앞에 둔 채 국민당을 창당한다.
유진산이 당수가 되자 신민당의 계보는 범(汎)진산계·반(反)진산계로 양분되고 다시 범주류·비주류·중도계로 재구성된다. 이러한 계파분화와 인맥계보의 형성 축은 반(反)군부 정치세력 형성을 위한 신민당 1세대의 권력안배를 잘 말해준다. 신민당은 1990년대까지 모두 세 차례 분열한다. 1970년대 초 제도화에 일단 성공하는 당의 모습은 신민당 본류(本流)로 1세대라 할 수 있다.
1970년 9월, 대통령 후보지명대회에서 유진산은 김영삼을 후보로 추천한다. 그러나 김대중과 이철승이 연합세를 형성, 김영삼을 역전패시키자 진산계파의 힘은 또 다시 분산된다. 이를 계기로 비주류계는 ‘이(李)’ 지지세력을 급속히 신장시켰고 1971년 5월 유진산 당수의 전국구 1번 등록을 계기로 당은 다시금 파동에 휩싸인다. 이를 고비로 진산이 당수직을 사퇴하자 비주류계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1971년 5·25총선에서 89석을 얻은 신민당 내 계파 판도는 크게 달라진다. 유진산을 중심축으로 모여든 범주류는 진산파동 이후 김영삼·고흥문계와 양일동계로 갈라지고 이철승과 정해영이 독자세력을 이루기 시작한다. 한편 비주류는 김대중 중심으로 단일 세력권을 형성한다. 당수 권한대행을 맡은 김홍일 주변에는 김재광·김형일·노승환·심봉섭 등 중도계가 모여든다.
1971년 7월 20일 전당대회를 계기로 신민당 계보에는 또 다시 돌풍이 분다. 당수 후보로는 김홍일·김대중·양일동이 경합, 3차 투표에서 김홍일이 선출된다. 김홍일의 당선은 설욕을 다짐하는 진산직계의 결사지원과 김홍일의 친위세력인 김형일·김재광, 그리고 김영삼-고흥문계, 이철승계 등이 제휴한 연합세력에 의해 성사된다. 이를 계기로 김홍일의 주변세력은 독자계보로 성장하기 시작하고 진산직계이던 양일동마저 김홍일을 지지하게 됨으로써 진산과 결별한다. 김영삼-고흥문계도 독자세력을 구성할 태세를 갖춘다.
이같은 변모를 통해 당내 계보는 다시 범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중도계로 3분되는 가운데 범주류 안에는 ‘김홍일 당수계·유진산계·김영삼-고흥문계·이철승계·양일동계’의 다섯 계보가 편입된다. 비주류계는 여전히 단일계보를 형성한 채 지탱한다. 중도계로는 친주류 중도계와 친비주류 중도계, 그리고 순수 중도계 이외에 양 계보에 모두 줄을 대려는 이중 중도계까지 나타난다. 중도계를 제외하면 1970년대 초 신민당 파벌계보는 모두 6개 사단(師團)으로 편성된다. 이 사단의 보스들은 모두 1972년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수 후보로 나설 것을 전제로 전열을 정비한다. 이처럼 야당 내 계파는 한결같이 대통령 후보경합과 당권도전, 요직 안배와 국회의원 공천이란 권력투쟁과 정치적 예상실익을 위해 치열하게 이합집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