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의 한국 계파정치 ?] 배신의 달인 이승만, 결국 4·19로 하야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정치학자 김영명은 자신의 저서 <한국의 정치변동>(을유문화사, 2008)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승만과 그 부하들 사이에는 충성과 은덕 또는 물질이나 지위의 보상이 교환되는 일종의 후원-피(被)후원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정치적 경쟁 가능성을 보인 인물에 대해서는 비정한 숙청이 뒤따랐다. 이러한 후원-피후원 관계는 야당세력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여야를 막론한 정치세력들 간에 횡행한 파벌 다툼의 기초가 된다. 여기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를 규정하는 유교문화와 국민일반의 미숙한 정치의식이 한몫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제도의 발전을 저해, 점차 성장한 사회 정치세력의 도전을 여과할 정치적 중재기구를 개발하지 못한다. 그 결과는 시민봉기에 의한 이 정권의 붕괴였다.”(76쪽)

해방 3년의 정치공간은 단속적(斷續的) 테러와 암살로 이어진 폭력 배양기로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송진우·장덕수·김구·여운형 등이 암살되고 박헌영의 월북과 김일성의 숙청 주도로 남북한 정치현실은 결국 김일성과 이승만만 남아 1세대 경쟁주자 거의가 사라지는 방향으로 마무리된다. 누가 어디서 언제 그리고 왜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는 아직도 흔쾌히 규명되지 않는 해방공간의 미스터리다.

경쟁주자 대부분이 사라지고 미국의 지원과 단정노선의 설득력을 확보한 이승만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마키아벨리즘을 동원한다. 무엇보다 그는 급부상한 한민당의 독주가능성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고 견제의 일환으로 반(半)정치적 대중조직인 ‘독촉(獨促)’을 결성한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신익희와 이범석·이청천 등을 포섭함으로써 자신의 지지세를 확보, 카리스마 체제의 인적 구성에 성공한다. 한편 이승만은 건국 후 초대 내각 구성과정에서 한민당 당수 김성수를 총리지명에서 끝내 배제한다. 뿐만 아니라 같은 당 출신의 윤치영(내무), 장택상(외무), 이인(법무), 김도연(재무) 등을 기용하지만 결국 김도연을 제외한 세 사람을 한민당에서 떠나게 만듦으로써 당 최초의 분파를 초래한다. 자신을 기용한 대통령을 버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몸담은 정당을 거부할 것인지 갈림길에서 이들은 과감히 당인(黨人)으로서의 역할을 저버린다.

한민당의 지원을 받아 의식주를 해결하고 국회의원에서 대통령까지 된 이승만은 이렇게 한민당을 버린다. 외무부를 맡으려던 조병옥의 요구도 어림없었다. 이승만의 이같은 행태에 격분한 한민당은 오히려 신익희와 이청천을 다시 영입, 민주국민당으로 당 모습을 확대 개편한다.(1949년 2월10일) 신(申)과 이(李)의 두번째 변신이 이루어진 셈이다. 특히 이들의 당내 위상변화에는 국회 프락치사건을 계기로 한민당 소장파와 노장파의 파쟁이 큰 계기로 작용한다. 이제 야당으로 변모한 민국당은 당 체제를 정비해 반(反)이승만 입장에서 내각책임제 개헌공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윤치영은 이에 맞서 대한국민당을 결성해 철저히 ‘이승만 방어’에 나선다.(1948년 11월12일)

재임 초기의 이승만 대통령
재임 초기의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시대의 한국정당 내 계파발생 사례를 찾아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유형이 오늘의 한국 계파정치현장까지 교차 반복한다는 점이다. 첫째 주목하게 되는 유형은 기존 정당의 내부분열로 당내 분파가 독립변수로 작용할 때다. 둘째로는 민국당처럼 정당단체가 통합함에 따라 정통파인 한민당계가 주류로 존재하고 이와 접목하는 신익희계가 비주류로 기능함으로써 양대 계파가 단일정당에서 공존(혹은 공조)하는 경우다. 따라서 민주당 구파의 구 신민당 결성이나 구 평민당계 소장파 중심의 ‘정치발전연구회’ 혹은 1990년 1월의 민자당 결성 등은 한국정당사에서 끝없이 반복된 두 가지 계파 발생요인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야당 계파들이 대를 이어 꾸준히 인맥과 계보를 형성한 데 반해 자유당과 민주공화당, 그리고 민주정의당과 민주자유당, 신한국당과 한나라당, 새정치국민회의와 열린우리당 등 집권여당 계파들은 단절된 정치 환경 속에서도 각기 최고집권자를 향한 ‘은총경쟁’ 형태로 계파의 세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김종필-노태우’의 정치밀약이 두 가지 계파결정요인 외에 어떤 다른 의미와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이승만은 정당을 통한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측근 충성세력, 즉 경찰과 관료들에게 직접 지시하는 방법을 더 좋아한다. 한민당을 버리게 된 그의 정치 심리적 배경에도 그들이 장차 ‘중대한’ 반대세력으로 성장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반(反)정당적’ 사고는 대한국민당에 대한 미온적 태도에도 잘 나타난다. 이승만은 정당이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한 정치과정적 수단이라는 원론적 개념을 잘 알면서도 막상 정당의 존재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한낱 걸림돌일 뿐이라고 보았던 셈이다. 따라서 그는 한 정치집단의 지도자이기 보다 전국적 리더로 자신의 위상을 강화·유지하는데 자기 카리스마를 최대한 활용한다.

이승만의 초기 카리스마가 겨눈 과녁은 경쟁 계파들의 상호견제와 관리로 맞춰진다. 즉 이승만은 단일정당의 어느 한 계파에 대한 배려보다 상호 경쟁하는 계파들끼리 더욱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방임한다. 나아가 자신에 대한 어느 한 계파의 정치적 거부가 다른 세력들과 연계되지 않도록 카리스마를 응용하기도 한다. 한민당과 독촉, 민국당과 대한국민당과의 관계유지는 이승만의 이같은 통치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리더십은 계파를 직접 관장할 때 나타나는 인간적·심리적 부담을 크게 줄여주는 이점(利點)이 있었다. 아울러 경쟁계파들을 교묘히 안배함으로써 정당정치 체제라는 민주적 ‘모양 갖추기’에 기능적으로 활용한다. 그 외피 안에서 이승만은 끝내 정치적 ‘안전판’을 찾는다.

그러나 집권 후기에 이르면 이같은 파벌 안배의 균형은 깨진다. 1956년 부통령선거 패배와 1958년 의원선거에서 자유당 패배는 이승만과 이기붕으로 하여금 반대세력에 대한 정치적 억압을 강하게 부추긴다. 이들은 자유당 내 비주류나 온건파들을 당에서 추방·박해한다. 결국 당내 핵심추종세력들만 요직에 임명된다. 자유당 말기 영향력을 행사한 핵심 추종세력에는 국회의원으로 장경근·한희석·이익흥·임철호·김의준 등이 있었고 각료로는 최인규가 대표적이다. 이들 측근세력만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한 이승만의 말기적 발상은 결국 4·19로 좌절되고 1951년에 결성된 자유당 역시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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