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의 외교 안보분야 성적표는?
이승만·노태우 단연 으뜸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새 국정교과서에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기술하지 않고 ‘대한민국 수립’으로 기술한다고 한다. 이때의 ‘대한민국 수립’은 “조선은 1392년에 건국되었다”는 차원의 건국이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문자 그대로 ‘임시정부’였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것은 기미독립운동에 의해 이루어진 국민국가의 이념을 계승한다는 의미이지 아직 ‘존재하지도 못한’ 국가의 실체를 계승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국토, 국민,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국가의 요소를 제대로 갖춘 것은 1948년 8월 15일을 효시로 한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기까지 이승만의 노력은 외로웠다. 심지어 민족의 영수인 김구와 김규식도 김일성에 농락되어 대한민국 수립에 한 저해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외교의 천재였다.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던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한 이승만은 국제법에 입각하여 독립의 전략을 설정하고 투쟁해온 전략가였다.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대소 봉쇄정책이 나오기까지 그의 경륜은 루즈벨트를 포함한 미국 정부의 지도자들을 능가했다. 1953년 6.25전쟁 한가운데서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낸 이승만의 공적은 처칠을 경악하게끔 할 정도로 절대(絶大)하다. 그는 법적인 근거를 얻어내는 협상의 중요함과 경로를 꿰뚫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가열찬 외교전쟁을 지휘했다. 후일 노무현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실체인 한미연합작전체제를 흔들려 한 것은 이승만의 논리와 노력에 대한 무지의 소치인데, 참으로 유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5년 월남전 종식에 자극받아 자주국방의 원년을 열었다. 한일수교와 월남전 파병에 따른 수익으로 겨우 발돋움하는 경제 형편에서 방위세를 만들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국내외 인재를 동원하여 ADD를 만들었으며, 특명검열단을 만들어 율곡사업의 진행을 직접 통제했다. 이 가운데서도 중화학공업 육성과 자주국방건설을 연결시킨 것은 탁월한 국가경영전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전략의 계속 진행을 위해 필요하다는 10월유신이 ‘국가안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국민의 단합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불행한 일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공산권이 몰락하는 시대의 변전(變轉)을 잡아 북방외교의 지평을 열었다. 북한과도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가운데의 잠정적 특수관계’를 설정했다. 이와 같은 북방정책의 추진은 그때까지의 한국의 외교안보정책에 있어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도 모두 여기에 근거를 둔다. 그는 국가안보회의(NSC)를 가장 체계적으로 운영한 대통령이었다.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연 그의 통치방식도 이와 같은 외교안보정책 구상과 운영방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대중과 임동원은 큰 틀에서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디테일에서 노태우와 김종휘의 대북전략 경륜을 넘어서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굳게 하면서 한중우호협력으로 통일외교의 지평을 넓히려는 적극적 외교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이니셔티브는 신선한 것이다. 그러나 외교안보정책의 의사결정이 충분히 제도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외교안보는 국헌 준수와 더불어 대통령의 가장 큰 책임이다. 대통령은 Chief Diplomat이자 군의 통수권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