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민했던 2야전사령관 조성태 “모든 보고는 내게만 하라. 위는 내가 책임진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대침투작전은 평시작전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5년의 홍성작전이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실패한 작전은 1996년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다. 이후 NLL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북한 해군의 도발이 지속돼 합참과 해군의 관심이 서해안에 집중되고 있지만 언제고 내부로 침투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해야 한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작전에서의 작전지휘는 문민이 통수권자가 되었을 때의 주의하고 보완해야 될 점이 무엇인가를 적나라(赤裸裸)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대통령은 국민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작전을 조기 종결할 것을 지휘부에 독촉하면서 수시로 전화를 걸어 작전상황을 물었다. 작전에 집중해야 될 군사지휘부는 대통령의 질문에 답변하는 데에 온갖 신경을 집중한다. 당시 국방부장관은 공군참모총장 출신의 이양호 장군과 합참의장은 한미연합사령관 출신으로 영어는 매우 유창했지만, 베트남전에 참여한 바가 없었다. 육군참모총장은 전술의 대가로 정평이 있었지만 818체제에 따라 작전계선에 있지 않았다. 대침투작전은 육해공 합동작전이기보다 대부분 육군작전이다. 합참의장이 여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다가 한반도 전쟁억제라는 큰 그림에 소홀히 할 수가 있는데, 이는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과제다.
대침투작전은 기본적으로 향토사단장 책임 하의 통합방위작전이다. 책임지역을 벗어난 작전 협조와 통제는 2군사령관의 책임이다. 조성태 당시 2군사령관은 이를 명확히 하였다. “모든 보고는 나에게만 하라. 그 위는 내가 책임진다”고 하여 사단장이 오로지 작전지휘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성태는 장관으로서 빈틈 없고 간명한 국회답변과 연평해전의 승리로도 유명하지만 육군대학에서 유명한 전술교관이었다. 대침투작전에서의 핵심은 위임과 집중이다. 어차피 현장의 성과는 지휘관의 전투감각에서 결정된다. 월남전에서 유명한 ‘싸움꾼’ 서경석 장군은 <전투감각>이라는 책을 썼다. 장군은 장교들의 전투감각을 키우는데 집중하되, 작전이 벌어지면 예하에 위임할 수 밖에 없다. 조성태는 이 원칙을 분명히 체득하고 있었다.
월남전에서 철군이 진행되는 시점에서의 안케패스작전은 장군으로서 이세호의 역량을 드러내었다. 이세호는 3군사령부를 창설하였는데 3군사는 상당히 시간이 흐른 다음에도 백선엽이 창설한 1군사령부에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6.25전쟁지도는 결정적 위치에 인사를 잘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데서 보듯이 그의 대전략은 당대에 따를 사람이 없었다. 작전은 릿지웨이, 밴 플리트 등 일류 장군들이 잘 이끌었고, 전투지휘는 충용한 청년장군들이 빠르게 배워가며 잘 했다. 박정희는 탁월한 장군이었지만 통수권자는 인사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기에 놓쳤다.
문민 대통령이 통수권자로서 할 일은 국방장관, 합참의장, 각군 참모총장을 잘 선택하고 이들이 소신껏 일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彼我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특히 동맹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투는 장군이 전문가이다. 漢의 장수 韓信이 황제 劉邦에게 지도력의 비결에 대하여 물었을 때 “汝는 兵之將이나 朕은 將之將”(그대는 병사들의 장군이나, 나는 장군들의 장군이다)이라 하였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독일 장군들은 작전 전문가였다. 그런데 전쟁을 잘못하는 히틀러가 모든 것을 흩으러 놓았다.
조성태 장군은 명민한 야전군사령관이었다. 병상의 조 장관의 쾌유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