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골 이만섭’ 떠난 자리 ‘미스터 쓴소리’ 조순형이 채울 수 있을까?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별세했다. 세인은 이만섭을 강골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1950년대 자유당 정권에 대한 강열한 투지와 함께, 1960년대 한국정치를 지배해온 박정희와 3김에 굽히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 서거한 김영삼과 같은 반열에 놓기에 부족함이 없는 정치인이었다. 이만섭은 그를 정치인으로 발탁한 박정희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강골이었다. 2인자라는 김종필마저도 끝내 굽히고만 3선 개헌에 그는 끝까지 반대했다. 이러한 주장을 야당도 아닌 집권당 내에서 관철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만섭이 연세대에 다니다가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는데 사고에 책임지고 뛰쳐나와 다시 연세대로 돌아간 것은 그의 불같은 성격을 말해준다. 그와 비슷한 연배의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그 무렵의 군 복무기록이 엉성한 것과 뚜렷한 대조가 된다. 이만섭은 연세대에서 응원단장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안암골 호랑이와 더불어 불타는 의기와 낭만의 표상 ‘신촌 독수리’가 수천 건아를 이끌고 천지가 진동하는 응원을 지휘한다는 것은 보통의 리더십이 아니다. 사관학교에서도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에서 응원을 이끄는 응원단장 출신이 탁월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종종 연대장 생도 등 생도지휘 근무생도로 지명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만섭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언론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평시에 분초를 다투는 전쟁이 이루어지는 곳이 언론사다. 군인은 전공으로 말한다. 백선엽 장군이 영웅으로 숭앙되고 있는 것도 6.25전쟁에서의 전공이 하늘을 덮기 때문이다. 군인에게 실전이 벌어지는 상황은 드물다. 그러나 언론인은 기업과 같이 하루 단위, 시간 단위로 실전이 벌어지고 승패가 결정된다. 그만큼 정치의 터전인 국민의 마음을 잘 읽고 기민한 판단력이 필요하다. 언론계에서 훈련된 인재가 정치로 수혈되고, 관료 출신보다 성공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국가원수와 행정부의 수장 등 양자(兩者) 역할이 결합되어 있다.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며 국민통합의 중심으로서 영국 국민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 대해서 보내는 것과 같은 존경과 애정을 받아야 한다. 동시에 대처 수상이 국회에서 벌이는 것과 같은 치열한 정치투쟁도 하여야 한다. 근래 정치인들, 특히 야당이 대통령에 대한 도리와 정치인에 대한 투쟁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국회운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도 3권분립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만섭은 김영삼의 날치기 의안 처리 요구를 거부해서 국회의장에서 밀려났다. 여기서 의회 정치인으로서 이만섭의 분명한 판단과 처신을 높이 사야 한다. 그는 마땅히 페리클레스와 같은 지도자로 국회에 봉정되어야 한다.
이만섭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제 ‘쓴소리’를 할 수 있는 원로 정치인은 조병옥의 후예 조순형 정도 남아 있다. 정정지기 당당지진(正正之旗 堂堂之陣)을 펼치는 이들은 국가의 보배다.
우리는 강골 이만섭에게서 오늘날 보기 힘든 꼿꼿한 조선시대 조광조와 같은 기백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