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신문’ 김형오 전 국회의장 인터뷰 “한국정치 혼란의 본질은 무엇인가?”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최근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를 통해 “한국의 계엄령은 잘못했다. 더구나 너무 엉성하기까지 했다”며 “이재명 대표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하면 결코 대통령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계엄의 위헌 불법 여부를 헌재에서 철저히 가려야 한다”며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 대신 의원내각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의장 인터뷰는 10일자 아사히신문 지면에 ‘한국정치 혼란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보도됐다. 이 신문은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령은 국회에서 곧바로 해제된 후 대통령은 지금 탄핵·파면 여부의 문턱에 서 있다”며 Δ혼란스러운 한국 정치는 어떤 상황인가 Δ무엇이 윤석열 대통령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었나 등 한국정치 문제의 본질을 김 전 의장에게 물었다. <편집자>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계엄령은 한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
“한국은 북한과 싸운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져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다. 1953년 휴전 이후 그 나라를 바로 피와 땀과 눈물로 재건하고 도움을 받는 쪽에서 주는 쪽이 된 것이다. 단기간에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정보화를 이룬 것에 대한 자부심이 우리 한국인에게는 있다. 그런데 계엄령이라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 대외적으로도 그동안 쌓아온 한국의 신인도는 뚝 떨어졌을 것이다.”
-윤 전 대변인은 취임 때부터 ‘자유’, ‘민주주의’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런 사람이…
“그는 비상계엄의 이유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목적이라 하더라도 수단과 절차가 자유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서는 절대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윤 대통령은 계엄령을 내놓음으로써 스스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크게 후퇴시켰다.”
-그 정도로 몰리고 있었다는 건가?
“국회에서 과반 의석을 훌쩍 넘는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행태에 지나친 점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무런 하자가 없는 장관이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수사를 하는 검사들을 차례로 탄핵하는 등 횡포라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 와중에도 참는 것이 민주주의다. 견디어 내고 유권자에게 판단을 받는다. 화가 나니까 계엄령이라는 게 말이 안 된다.”
윤 대통령의 약점은 술, 성질, 말
-검찰 외길을 살아온 윤 대통령을 떠받든 것은 여당 여러분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파면된 후유증을 질질 끌면서 우파 보수 진영 중에 이길 후보가 없었다. 그럴 때 빛을 발한 것이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법에만 따르겠다)며 많은 정치인을 소추해 온 검찰총장 윤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상의하달의 조직으로 상사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더욱이 윤 대통령의 약점은 술, 성질, 말 등 세 가지가 지나치다는 것을 모두 충고해 왔다. 술을 많이 마시고, 주위에 분통을 터뜨리며,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고 만다. 검찰 간부의 심정 그대로 정치지도자가 돼 버렸다. 설사 정의감이 있어도 인내심이 없으면 민주정치를 할 수 없다.”
-기존 한국의 보수와는 다르다는 건가?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보수정권이 이어져 왔다. 그 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 한국에서 진보라 불리는 좌파정권도 탄생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현재 여야를 이끌고 있는 것은 진정한 보수, 진정한 진보라고 할 수 없다.”
-무슨 말씀인가?
“그동안 한국의 보수는 스스로가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항상 자기 성찰, 자기 개혁을 해왔다. 이번 계엄령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진보세력은 어떤가?
“지금의 진보는 자신의 신념만 관철하려 할 뿐 이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포용력이 없다. 예산을 뿌리는 포퓰리즘도 눈에 띄어 돈으로 표를 사는 듯한 면이 있다. 진보라기보다는 낡고 진부하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배제 논리로 정치를 하고 있다. 내가 진정한 진보 정치인으로 평가하는 건 김대중 대통령 정도다.”
-야당은 ‘탄핵카드’를 꺼내고 있다.
“헌법에는 분명히 국회는 탄핵소추를 의결할 수 있다고 돼있다. 하지만 가볍게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수의 힘으로 각료들을 협박하는 것과 같은 행위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노무현, 박근혜 두 명의 현직 대통령이 탄핵소추되었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 법으로 금지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탄핵 이유였다. 그는 진보 성향이었고, 당시 야당이 탄핵소추안을 제안했지만 그때 국회의원이었던 나는 대통령을 그만두게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끝까지 반대했다. 그 한 달여 뒤 총선이 있었고, 우리 당은 나를 공천하지 않겠다고 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가 기각해 대통령에 복귀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됐다.
“박 대통령은 지인을 국정에 개입시킨 것 등이 문제가 됐지만, 나는 탄핵 재판보다는 박 대통령이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박 대통령 주변은 탄핵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탄핵 재판에 임했지만 거센 여론의 압력을 느꼈는지 헌법재판소가 파면을 결정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중진들의 의견을 듣고 사임을 표명하고 질서 있는 퇴진을 했다면 혼란은 가라앉고, 보수가 궤멸상태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이번에는 헌법재판소가 철저히 위헌, 불법 여부를 심리해야 한다.”
-탄핵·파면이 되면 60일 이내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야당의 이재명 대표 자신도 많은 혐의를 받고 있어 그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대선을 치르고 싶은 마음이 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 대표는 대통령 자리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길을 막는다고 생각되는 이른바 ‘방해꾼’은 모두 탄핵하고 국정을 마비시킨다? 그런 속 좁은 정치 지도자를 유권자들은 원할까? 탄핵 남발은 정치문화를 후퇴시킬 뿐이다. 유권자들은 이재명 대표가 차기 대통령에게 적합한 그릇인지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왜 한국에서 이렇게까지 좌우 양극화가 진행되었을까?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는 정치인이 되는 과정의 문제다. 여야 모두 보스의 권한이 절대적이어서 공천을 받고 싶은 사람은 충성을 맹세한 뒤 상대방을 적처럼 여겨 철저히 공격해 악마화하고 만다. 당선 후에도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 공천받을 수 없는 정치가 되고 있다. 또 한국의 지나치게 치열한 수능 경쟁도 배경에 있다. 어릴 때부터 어떻게 하면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는 데만 치중한다. 인성교육이 필요한데 학원 다니느라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다.”
-언제부터 양극화가 진행되었나?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권에서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에 뿌리 깊은 지역감정 극복을 계속 호소한 대통령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립은 격화됐다. 큰 요인은 국내에 다양한 시각이 있는 한국의 현대사를 일방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을 남북 분단의 원흉,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로 보고 좋은 면을 평가하지 않았다.”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현재의 대통령제를 끝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지속된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주화를 이룰 때 시민들이 가장 갈망했던 것은 대통령을 스스로 뽑는 직접 투표가 아니었나?
“맞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그 사명은 완수했다. 임기 5년이라는 한국과 같은 대통령제를 가진 나라는 없다.”
대통령 권한의 대폭 이양을
–왜 대통령제와 양극화가 관계가 있다고 보나?
“나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 청와대에서 비서관을 지낸 적이 있다. 한국 대통령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정말 대단하다. 게다가 모든 인사권을 가지고 있다. 검찰, 경찰, 국세청, 정보기관, 방송과 통신 등에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방송통신위원회, 금융기관을 감독하는 금융위원회 등의 총수 임명권은 모두 대통령에게 있다. 대법원, 헌재 수장도 대통령의 뜻이 반영된다. 제왕적 대통령제 등으로 불리는 절대 권력을 목표로 각 당의 두목이 각축전을 벌인다. 그 밑의 정치인은 보스를 부축해 혜택을 받으려고 격렬하게 대립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다.
“5년 안에 어떻게든 절대 권력에 매달리려는 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2008년 국회의장이 됐을 때 일성으로 헌법을 바꾸자고 당부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재선을 허용해야 한다는 연구기관도 있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대통령 임기를 놓고 개헌의 필요성이 지적되어 왔다. 왜 실현되지 않는 건가?
“그 당시의 현직 대통령이 난색을 표하기 때문이다. 내가 개헌을 주장할 당시에는 이명박 대통령이었는데 취임한 지 얼마 안 돼서 참모들이 굉장히 싫어했다. ‘이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다, 아무도 그것을 짧게 하라고 하지 않는다’고 설명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개헌이 되면 이슈는 그쪽으로 옮겨가고 자신의 레임덕화가 빨라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대통령의 임기를 바꾸는 것만으로 문제가 개선될까?
“권한을 대폭 이양하지 않으면 제왕형 대통령이 오래가는 독재국가가 될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내각제로 해야 한다. 아무리 근소한 차이라도 당선된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주는 제도는 수명을 다했다. 각계각층의 의견을 대변하는 의원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고 또 어떤 정당이나 개인이 잘못된 판단을 할 경우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양원제로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한국에서 그 기운이 무르익고 있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이 정도의 정치적 대혼란을 초래했으니 오히려 개혁의 호기로 보고 이번 기회에 단번에 크게 변혁해야 한다.”
-이번 계엄령은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윤 대통령에 대해 가장 평가하는 것은 악화됐던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킨 것이다. 강제징용 문제에서 정말 용기 있는 결단을 했다. 미국과의 관계도 복원했다. 작은 문제를 키우고 큰 문제를 작게 만드는 세력이 한일 양측에 있다. 그러나 격려가 되는 것은 양측 시민 간의 교류다. 일본에 오는 외국인 관광객 1위는 한국으로 그것도 압도적인 1위다. 일본 정부는 이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일본 유치 활동의 성과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기 때문에 온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앞으로 한일은 어떤 협력을 해나가야 할까?
“양국이 잘하는 분야를 살려 협력해 세계로 나가야겠다. 앞으로는 AI(인공지능) 분야 등이 좋을 것 같다. 또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것은 두나라를 해저터널로 연결하는 것이다. 어느 종교단체가 하는 게 아니라 두나라 정부가 주체가 돼 진행한다. 규슈와 부산을 연결하면 상징성뿐만 아니라 실용성 면에서도 크게 관계가 비약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되는데 한-일간에 안 될 이유가 없다.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