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 생각] ‘생니’ 말고 ‘앓는이’ 제대로 빼 군개혁도 하고 사기도 올려야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필자가 22년전 <한겨레신문> 기자 국방부 출입기자 시절 얘기다. 당시는 30년 이상 군출신 대통령에서 민간 정치인인 대통령으로 바뀌면서 군내에는 시베리아의 회오리 바람이 쌩쌩 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남한테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답게, 그동안 최고 권력집단인 군부에 대해 가장 먼저 개혁의 메스를 들이댔다.
하나회 제거와 율곡비리 감사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국민들은 열광했다. 그동안 가장 센 권력집단이 민간출신 대통령한테 맥없이 무너지는 것에 박수를 보냈다. 필자도 군 내부를 정확히 모른 상태에선 대변인실에서 주는 보도자료에 근거해 ‘기사 베끼기’(‘기사를 썼다’고 하기엔 아직도 부끄러운 기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에 급급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1993년 5월로 기억된다. 국방부 청사엔 아카시아향이 짙었었다) 대변인실의 P중령에게 김영삼 정부 출범 후 3개월 동안 현역에서 퇴출당한 장군들 명단과 뒷얘기 등에 대해 물었다. 그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국방부가 뭐 청와대 용병인가?”
당시 군인사개혁은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국방부는 이를 그대로 따르는 데 충실하는 역할에 그쳤다는 얘기다.
앞서 그해 4월 해병대 L장군이 진급과 관련해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과 함께 강제예편됐을 때는 “앓던 이는 놔두고 생니만 뺐다”는 얘기가 파다하던 터였다. 장군은 물론 영관급 장교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진급을 시킨 C사령관이 진급청탁을 위해 뇌물 바친 군인들은 놔두고 진급 후 닦달받다 못해 감사치레로 돈을 바친 L장군 이름만 검찰에서 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율곡비리 감사때도 양상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서슬퍼런 이회창의 감사원은 혐의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장군들 명단부터 언론에 발표했다. 30년 이상 군인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숱한 장군들이 옷을 벗어야 했다. 황해도 출신으로 부산에서 근무하던 3성 장군의 전화기 넘어 음성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는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혹여 우리가 잘못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언론에 이름을 흘리면서 마치 군대가 모두 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몰고가는 것이 옳다고 보슈, 기자 양반?” 그는 물론 감사원 조사와 검찰결과 아무런 혐의가 나오지 않았다.
이듬해 예편 한 그는 96년 7월 암으로 별세했다. 그를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그의 얼굴을 처음 대했다. 기자는 이미 국방부 출입을 끝내고 편집부에서 내근을 하던 때였다. 영정 속의 C장군은 “기자 양반, 세상에 억울한 일도 많지만, 나는 대한민국을 지키느라 청춘을 보낼 걸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말하는 듯했다.
그후 4반세기가 거의 다 지난 지금 우리는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통영함 납품비리 혐의로 구속됐던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이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황 전 총장 외에도 해공군 방산비리로 구속된 사람들이 여럿 무죄판결을 받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지난해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방산비리를 이적행위로 규정하면서 합수단이 꾸려지면서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다. 합수단에 의해 밝혀낸 것도 있지만 수사상 문제도 드러났다. 부실한 수중 음파탐지기(소나) 수사는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러나 소나의 납품을 결정한 황 전 총장(당시 방위사업청 소장)이 진급할 목적으로 정옥근 해군참모총장의 부탁을 받고 시험평가서를 조작하도록 지시했다는 부분이 무죄가 났다. 함께 구속됐던 장교 7명도 무죄를 받아 풀려났다.
공군에서도 방산비리 수사과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후배들 타는 전투기 정비대금 240억 떼먹은 예비역 장교들”이라는 제목으로 금년 2월부터 국민의 공분을 샀던 공군 예비역 중장, 예비역 대령 2명은 1심에서 혐의 없음으로 무죄판결이 나왔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수감되어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연루된 장교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 부인은 “내 남편이 국가를 위해 명예롭게 평생을 산 사람인데 비리의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라는 유서를 남겼다.
반면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방산비리에 대한 이중적 태도탓인가? 통영함, 와일드캣은 이전 정부의 비리이고 KF-X는 현 정부의 고위 안보 책임자가 연루됐기 때문인가? 현 정부의 비리 의혹은 감추고 지난 정부의 것은 무리해서라도 들춰내겠다는 것인가?
왜 그런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 두 군출신 대통령 외에는 역대 어느 대통령 이상으로 군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많다고들 한다.
대통령은 군 최고 통수권자다. 지금 군은 어느 때보다 신뢰와 사기가 필요한 시점에 와있다. 군의 사기는 군통수권자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군 개혁과 방산개혁은 시대적 과제로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 그리고 군 스스로도 내부를 되돌아보며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더 안타까운 것은 “너희 군인들 원래 그랬잖아?” 하는 국민들의 무관심과 선입견이다.
군인은 명예와 사기를 먹고 산다. 대다수 군인들은 계급장을 달던 첫 순간을 기억하며 고난과 역경을 버텨나간다. 이제 그들에게 냉대와 편견 대신 따뜻한 관심과 고마움을 보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