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 생각] 대표지성 ‘사상계’ 창간 장준하, 반독재 선봉 천관우 선생께 ‘매거진N’을 바칩니다

[아시아엔=이상기 기자]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다가오면서 무더위가 한풀 확실히 꺾인 듯합니다. 어제(8월17일)는 40년 전 장준하 선생께서 의문의 서거를 하신 날이지요. 장 선생의 죽음을 두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유신 반독재 체제에 앞장섰고, 당시 <사상계>를 통해 지성인들을 끊임없이 일깨웠다는 사실이지요.

아마 제가 기자를 하기로 결심하게 된 첫 계기는 장 선생이 돌아가시던 1975년 초여름이었습니다. 지금은 두어 집 남은 청계천 헌책방에서 우연히 천관우 선생께서 쓰신 <言官史官>을 사들고 그 날로 다 읽으며 ‘나도 이 담에 기자가 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거지요. 동아일보 등에서 날카로운 글로 권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반계 유형원 연구로 실학사상을 일찌감치 소개한 분을 탐구당에서 나온 손바닥 크기의 책을 통해 알게 된 기쁨은 오늘날까지 저를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이후 두 분에 대한 평가는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장 선생과 달리 천 선생에 대해선 변절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닙니다. 박정희 정권에 치열하게 항거한 천 선생은 이후 전두환 5공 정권에서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과 국정자문위원을 맡았다는 이유에서지요. 충주의 6평 임대아파트에 사시는 미망인을 10년전부터 세 번 찾아뵈면서 ‘과연 천 선생의 행위를 비난만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천 선생은 바로 전두환 대통령의 단임 후 퇴임을 조건으로 5공에 협조했다는 사실을 듣게 됐습니다.

존경하는 독자님.

폄훼, 칭송 이 가운데 특히 폄훼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글을 쓰면 쓸수록 절실히 느낍니다. 인터넷 댓글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세태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어제 아침 출근길 민병돈 전 육사교장님과 통화하며 다시금 옷길을 여미게 됩니다. 민 장군께서 작년 설날 아침 “1950년대 후반 내가 생도때 읽었던 사상계처럼 매거진N 그렇게 만들어보세요. 그때 대한민국 지식인 치고 사상계 안읽은 사람은 없을 거요” 하던 말씀이 떠올라 전화를 드렸던 것이죠.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과거를 잘 아는 장준하 선생이 눈엣 가시였을 거요. 장 선생 입장에선 독재정치하는 박 대통령이 안쓰럽고 ‘이건 아닌데’ 했을 거고.” 이어지는 민 장군 말씀입니다. “민영환 충정공 집안인 우리 민씨 중에도 친일행각 하면서 작위도 받고 해방 후엔 한국은행장, 고관대작 지내고 지금도 높은 자리에서 엄청난 부동산 갖고 떵떵거리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언제 나라 걱정했나요? 그래서 나는 전 재산 팔고 독립자금으로 내신 이회영 선생 가문을 대한민국 최고 명가라고 생각해요.”

광복절인 지난 15일 민 장군이 1973년 김포 1공수여단 2대대장 시절 하사관 부하들과 여름철 보신하는 자리에 저도 초대받았습니다. 60대 후반의 스무명 가까운 팔도사나이들과 80대 노병은 형제와 다름없어 보이더군요. 이름 없이 나라와 사회를 지켜온 자랑스런 보통사람들을 보면서 ‘아, 그때 천관우 선생의 언관사관을 읽고 기자 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그러한 분들의 생생한 삶을 저희 아시아엔과 매거진N에서 계속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 바로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처럼 저희 <매거진N>이 이땅의 지성인의 동반자가 되도록 독자님의 아낌없는 성원을 당부드립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신=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사가 아베 총리보다 훨씬 앞선다는 평가가 나와 흐뭇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장준하 선생 아들인 장호권님을 청와대로 초대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의 바람만은 아닐 겁니다. 마침 천관우 선생 기념관 추진 소식이 들려와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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