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등단 뒷얘기⑩최창균] 삼성그룹 노동자서 ‘현대시학’ 전봉건 주간 별세 직전 추천 등단
[아시아엔=최창균 시인] 내가 몸담았던 삼성전관(현 삼성SDI)에서 사원들과 화합을 위한 행사가 열렸다. 1988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생산3과 가창직(브라운관 포장반) 반장이 나에게 쪽지를 건네주면서 서울에서 전화가 왔는데 무척 다급한 일인 것 같다며 전화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쪽지에 적혀 있는 서울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대체 누군데 전화하라고 하는 것일까? 이 생각 저 생각 해보아도 전화 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생각나질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연고를 갖고 있는 서울 광화문에 사시는 어머님(법적인 어머님, 생모는 일산에서 거주함) 전화번호가 아니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혹시 시전문지 <현대시학>은 아니겠지? 생각하며 전화를 했더니 <현대시학>이었다.
시가 당선되었으니 오늘 내로 당선소감과 사진 1매를 가지고 오라는 당시 주간이셨던 전봉건 선생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또한 나를 수소문하여 연락하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당시 <현대시학>은 두 번의 추천으로 등단하는 제도였는데 나는 이미 1986년 겨울에 시를 응모했으나 아무 소식이 없어 채택이 안 되었구나 생각했었다. 그리고 1987년 겨울 <현대시학>에 다시 응모하였으나 이 역시 아무 소식이 없어 낙담하던 차였는데 두 번의 관문을 통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대시학에 큰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다. 다름 아닌 원고를 보낼 때 주소나 전화번호를 명기해야 하는데 어떤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황금찬 선생님의 추천을 원하옵니다”라고만 적어서 보냈던 것이다.
나는 1980년대 초반 중앙일보 문화센터(황금찬 선생님의 시 창작교실)에 접수하고는 12회 차 수업 중에 4회차 수업에만 참여했었다. 이후 일산에서 외롭게 시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때 황금찬 선생님께서 문화센터에 오라고 하여 나가 보니 장경린을 소개했다. 그렇게 만나 동인 활동을 함께 하며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시의 끈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전화 통화로 소통되었던 황금찬 선생님을 기억해서 였을까? 나는 현대시학에 아무 연락처를 명기하지 않은 채 원고를 보내는 무례를 범했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나는 두 번의 관문을 통과하여 등단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날 회사 행사장에서 빠져나와 수원역전 부근 사진관에서 거금 일만이천원을 주고 속성 흑백사진을 받아든 채 무조건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현대시학>이 있는 서대문구 충청로 2가로 가는 택시 안에서 당선 소감을 썼다. 사무실 바닥에 구멍이 뚫린 열악한 이곳이 <현대시학>이구나 생각하고 전봉건 선생님과 마주하였다. 수원에서부터 마려웠던 소변을 참을 정도로 긴박했던 시간이었다. 급히 오느라 아무것도 사들고 오지도 못했다.
마침 선생님과 마주 앉은 책상 위에 ‘태양’이라는 담배를 확인하고 “잠시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하고는 화장실은 다녀오지 못한 채 태양 담배 두 보루를 선생님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화장실은 급했지만 선생님은 장장 2시간 반에 걸쳐서 “현대시학 출신의 명예를 걸고 치열하게 시를 써서 한국문단을 빛내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건강한 삶에서 건강한 시가 나오는 것이다, 살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시를 놓지 말고 살아야 한다” 등 시인이 된 나에게 깊은 애정을 보이며 좋은 말씀을 한보따리 안겨 주셨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새겨들으며 계속 소변을 참느라 방광염이 걸려 한동안 병원을 다녀야 했었다.
전봉건 선생님은 나를 마지막으로 등단시키고 1988년 6월13일에 작고하셨다. 당시 정보가 어두웠던 나는 이후에 선생님 작고 소식을 듣고는 엉엉 울었다. 살면서 힘들거나 쓸쓸하고 외롭거나 하는 것이 시인의 길임을 일깨워주신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죽는 순간까지 시를 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후 포장공으로 일하던 나는 시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삼성전관 문학동우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내가 등단했던 1988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의 등단 작품인 ‘뱀’은 1987년 추천작이고, ‘벼랑에서’는 1988년 추천작이다. 나의 첫 시집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에는 이 두 작품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말은 시를 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으로 탄생시킨 이 두 작품을 버림으로써 다시 시인으로 태어나고자 했다. <유심> 편집실에서 등단작을 요구한 바 백방으로 작품의 출처를 확인하였으나 나의 역부족으로 찾지 못하였다. 이 또한 시인의 길에 있어 후일담이지 않겠나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개구리 울음소리
개구리 울음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렸다
어느 봄밤
물꼬 보려 논둑길 들어서자
뚝 그친 개구리 울음소리에다
나는 발을 빠뜨려
고요의 못을 팠다
한발 한발
개구리 울음소리 지워나갈수록
깊어지는 고요의 못에다
내 생의 발걸음소리 빠뜨렸던 것
나는 등뒤에서 되살아나는
개구리 울음소리 듣고는
불현듯 가던 길 잠시 멈춰 뒤돌아보니
내 고요의 못이 왁자하니 메워지는 소리 듣는다
비로소 내가 지워지는 저 개구리 울음소리
나는 그 논배미에서
벌써 걸어나와 집에 누웠는데도
개구리 울음소리는 줄기차게 따라와
내게 빠져 운다
내 삶의 못에 빠져 운다
최창균 198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한국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