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등단 뒷얘기⑨박라연] 두곳 동시당선 무효처리···”신문사 자존심이 목숨보다 크냐” 따지자 다시 번복, ‘등단!’

[아시아엔=박라연 시인] 지망생 시절 저는 익산에서 살았습니다. 세상에 와서 별로 갖은 것도 없으면서 딱히 부러운 것도 없어서 책만 있으면 그냥 행복해서 살았지요. 어느 날 해방 이후의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집이란 책이 저를 뚫고 들어와 버리기 전까지는…

눈만 뜨면 그 책을 읽었습니다. 데뷔작이란 대체로 한 시인의 일생 중 가장 영롱한, 신비한, 깊고 그윽한, 신선한 영혼의 응축이 배어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선배님들의 데뷔작이 실린 책, 그 책이 너덜거릴 때까지 읽었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선 이전보다 더욱 깜깜하게 살았습니다. 책에 실린 심사평은 유일한 스승이었으며 당선 소감은 시를 향한 경이의 촉수를 날마다 새롭게 건드려주더군요. 그 책을 통해 한 신문사에서는 최종심에, 또 다른 신문사에서는 같은 작품으로 당선작이 된 경우를 보았어요. 그래서 여러 신문사에 각기 다른 작품을 나름 분배해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로 1분 간격으로 두 신문사로부터 당선과 취소 통보를 받을 줄이야! 기뻐서 이방 저방을 뛰어다니는 데 또 벨이 울렸습니다.

A일보와 B일보에 제 응모작이 겹쳤고 하필 그 작품이 두 신문사 모두 당선작이 된 이유를 들면서 동시당선은 무효처리한다는 통보였어요. 겨우 오분 사이에 저는 천국과 지옥을 오갔죠. 너무나 수치스러웠어요. 무슨 큰 죄를 진 것처럼 부끄러워서 덜덜 떨었어요. 그만 살아야지! 했던 것 같아요. 지망생 시절 수많은 젊은이들과 경쟁해야 하는 신춘의 문을 나이든 제가 어찌 통과하겠냐며 남편은 말렸었죠.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면 살림이나 더 열심히 하라면서 쓰레기통 옆에 빨래를 가득 쌓아놓고는 화를 내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는 이전보다 좋은 아내, 엄마가 되려고 가족 중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나중에 잠들었습니다. 응모기간 내내 눈감고 있는 저를 본 적 없다면서 남편조차 제 편이 되어 “네가 당선이 안 되면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하더군요.

근데 동시당선으로 취소를 당하자 “평범하게 살라는 암시같다”며 저를 달랬습니다. 그러나 날이 새자 절더러 옷 입고 따라 나서라 했어요. 아들까지 학교도 안 보내고 안개 속을 무서운 속도로 신문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A사 문학담당 기자님이 너무나 완강했기에 B신문사는 거의 체념한 상태로 찾았습니다. 솔직히 냉랭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취소통보를 했던 분의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근데 그 분의 눈동자 때문이었을까요?

저는 대뜸 신문사 자존심이 한 사람 목숨보다 크냐고 따졌지요. 그런 당찬 말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터져 나왔을까요? 그 분은 담배 한대를 피우고 나더니 우리가 포기할 테니 저쪽 가서 당선을 복귀시키라고 했어요. 늦으면 마치 그 기회마저 사라질 것처럼 차에서 내려 12월의, 붐비는 광화문 네거리를 뛰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데뷔이야기를 쓰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자판을 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시인의 길이 얼마나 엄중하고 험난한 길인 줄은 상상도 못하면서 그냥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유일하게 탐났던 젊은 날이 떠올라서였을까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했던 저만의 세계를 잃어버린 것이 아파서일까요? 대학에서 십년이나 시를 가르친 적 있는데 무척 소극적이었습니다. 왜? 법대나 의대였다면 침을 튀기며 열강을 했을지 모릅니다. 문학은 팔자여야 그 늪을 끝까지 건너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동짓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 가끔 …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 우리는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없으므로 더더욱

박라연 1990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빛의 사서함> <노랑나비로 번지는 오후> <우주 돌아 가셨다>. 산문집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박두진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 대통령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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