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등단 뒷얘기③신중신] ‘내 이렇게 살다가’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아시아엔=신중신 시인] 1960년대 초, 나는 오직 시인이 되고 싶은 일념뿐이었다! 고교 시절부터의 꿈이었고, 그것 외에 나로서는 (재주나 여건이나 가망성 따윈 차치하고라도) 어떤 일에서건 싹수가 노랗던 처지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등단이라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쯤의 신춘문예에 떠억하니 당선하여 문단에 입성하는 것도 그럴싸해 보였지만 나름대로는 더 군침이 도는 궁리가 있었다. 그건 당시에 한껏 성세가 드높았던 시사종합교양지 <사상계>에서 문단 등용문으로 꽤 괜찮은 금액의 상금을 내걸고 ‘사상계신인문학상’제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 소설 두 부문을 두었는데, 제1회엔 소설에, 2회엔 시에서 한 사람씩만 배출하더니 3회엔 그나마 어느 쪽도 당선자를 내지 않았다. 구미가 동한 여러 이유 중엔 이런 ‘좁은 문’도 언감생심, 매력의 하나임은 부정키 어렵겠다.
1962년 벽두, 나는 젊은이가 감내할 밖에 없던 암담함, 너절한 하루하루의 참담함, 미래가 꽉 막힌 낙담의 세월 와중에서 (그저 살아 있음의 시늉만으로) 습작시 가운데 다섯 편을 골라 봉투에 넣고 햇빛이 넘실대는 고향 우체국 창구에서 우표에 침을 발랐다. 내 보잘 것 없는 대학생활 2년간에 수확한, 정말이지 참을 수 없게 가벼운 질량감이 전율처럼 전신을 타고 내렸을 게다. 결과는 그해 4월호에 발표될 터였다.
로또가 없던 시절이지만, 나는 로또에 당첨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직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푼 어치도 안 되는 요행을 품고 서점을 찾아갔다가 그 요행에 엇비슷한 당월호 <사상계>지 사고(社告)를 접했다. 내용인즉, 연 2회 시행하던 신인문학상을 연 1회로 바꾼다는 거며, 따라서 공모마감을 9월말까지 연장한다는 알림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했던 이 돌변과 맞닥뜨리고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시간은 내 편이다. 전력을 쏟고 탁마하여 진검승부를 걸 일이다!
내 경우, 안 좋은 쪽으로는 으레 예외가 되는 법이 없나 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때의 결심을 나는 지키지 못했고, 시골생활의 실의와 나태에 빠져 역작에 매진하기는커녕 앞서 응모했던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먹고 세월아 네월아 하며 지냈다. 단지, 돈을 좀 손에 쥐어볼 요량으로 다방을 빌려 시화전을 열었다가는 심란하게 액자를 떼던 가을 오후였다.
외출 나온 걸음에 누님이 그날 집으로 배달된 편지봉투를 하나 전해 주는 게 아닌가. 뒷면에 세로로 사상계라는 한자 로고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웬 편지? 아니? “귀하가 응모한 시 ‘내 이렇게 살다가’ 외 2편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리며…” 순간, 짠짠짠 짜! 짠짠짠 짜!
나는 문인들이 항용 “문학은 구원이다” 라고 정의할 때 내심으론 별 시답잖은 소릴 다 듣는군 하고 뇌까리는 편이다. 만일 폴 발레리나 토마스 만 같은 진지한 문호가 말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을는지 모른다.
그렇건 말건 간에 ‘내 이렇게 살다가’나, 또는 금빛 팡파르로 손색없을 ‘사상계신인문학상’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 구원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심사위원이 일면식조차 없었던 조지훈, 송욱 두 분인 점도 어깨에 힘을 보태는 듯했다.
시상식을 이십여 일 앞둔 시점에 나는 고향의 공립 중학교에 그 잘난 강사직이나마 직업을 갖게 되었고, 이어 관철동 사상계 사옥의 영광스런 시상식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풍년을 구가라도 하듯이 소설 부문에서도 당선자(서정인)를 내어 수상자석에 자리를 나란히 했다.
뿐이랴 이태쯤 지난 후, 군문에 입대하여 떨떠름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차에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적을 둔 친구가 졸업작품으로 ‘내 이렇게 살다가’를 ‘피아노 클라리넷 바리톤 3중주곡’으로 작곡?발표한다는 전갈을 받고, 군복바지를 칼날같이 다려 입은 자태로 동대문 밖 옛날의 그 음대 교정, 여학생들로 넘쳐나는 연주회장에서 폼을 잡게 되었으니 시인이 되고자 한 일념뿐이었던 젊은이, 모름지기 무지개를 품은 듯하지 않은가.
게다가 이 시가 항간에 회자된 탓에 그 은은히 남은 빛이 상기도 가시지 않은지 오늘은 이처럼 등단 뒷이야기로 품을 팔기에 이르게도 되었다.
내 이렇게 살다가
내 이렇게 살다가
한여름밤을 뜨겁게 사랑으로 가득 채우다
모두들 돌아간 그 길목으로 돌아설 땐
그냥 무심코 피어날까,
저 노을은 그래도 무심코 피어날까.
그러면 내 사랑은
무게도 형체도 없는 한 점 빛깔로나 남아서
어느 언덕바지에
풀잎을 살리는 연초록이라도 되는가.
밤새워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던
우리 엄마는
죽어서 바늘구멍만한 자리라도 차지할까.
가을은
졸음이 육신 속을 스며들듯
나를, 시들은 잔디 사이
고요한 모랫길로 끄을고 가는데
끄을려 가는 발자국에 진탕물이라도 고여
내가 지나간 표지(標識)라도 되었으면…
꽃은 시들어
우리의 기억을 살리는 다리가 되나.
땅속에 사묻혀드는
한 가닥 향기로나 남아 있나.
살아서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모든 것이 되어
죽어서 모두들 돌아간 그 길목으로 돌아서면
가을밤 하늘에
예사로 하나 둘 별이 돋을까.
무심코 별은 빛날까.
신중신 1962년 <사상계> 등단. 시집 <투창> <카프카의 집> <아름다운 날들> 등과 시선집 <지상의 작은 등불>.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협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