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등단 뒷얘기①오탁번] 심사위원 조지훈·박남수·김종길 “우리 학교 학생은 곤란” vs “작품만 좋으면 돼” 맞서

‘신춘문예’. 한때 이 네 음절만큼 문학도들을 설레게 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시나 소설 등을 통해 문학가로 등단할 수 있는 길이 넓어졌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신문사 신춘문예는 시인이나 소설을 꿈꾸는 문학도들의 희망의 언덕이자 절망의 골짜기나 다름없었다. 올해도 주요 일간지들은 시, 소설, 희곡, 평론, 시조 등의 장르에 걸쳐 신춘문예를 통해 신인들을 대거 등단시켰다. <아시아엔>은 시전문 월간지 <유심>(편집고문 설악무산 조오현 스님, 발행인 겸 편집인 김도종)과 함께 ‘시인들의 등단 뒷이야기’를 연재한다.-편집자

[아시아엔=오탁번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1966년 신춘문예 응모철이 되었다. 마감은 대부분 11월 말경이었는데 <중앙일보>만이 창간된 지 1년밖에 안 돼서 그랬는지 다른 신문보다 한 열흘 정도 늦었다. 12월 10일인가 그랬다.

나는 그 전 해 신춘문예에서 시는 최종까지 갔다가 낙선하고 뜻밖에 〈동아일보〉에 동화가 당선된 적이 있었다. 그 후 소설 습작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스스로 시는 웬만큼 쓴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세상이 몰라보는 시는 그만 작파해버리고 내가 처한 극빈의 현실을 들끓는 복수심으로 불태우는 서사문학의 음험한 매력에 빠져서 아예 죽기 살기로 매진하였다.

<고대신문> 기자로서 캠퍼스를 횡행할 때였다. 1966년 신춘문예 응모철이 다가오자 나는 소설을 너덧 편 만들어서 신문사마다 일찌감치 투고하였다. ‘소설을 모조리 석권하다’는 달콤한 상상을 하면서 한숨 돌리고 있는데, 웬걸, 가슴 속에서 이상한 것이 자꾸만 꼼지락거리는 걸 느꼈다.

“너, 날 영영 버릴래?”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로 시의 소리였다. 소년시절부터 벗 삼아온 다정한 친구의 목소리였다.

그래. 좋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며칠 사이에 시 세 편을 썼다. 1년도 넘게 절교했던 애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듯 그렇게 썼다.

이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1967년 〈중앙일보〉에 당선된 것이었다.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였다. 심사위원은 조지훈, 박남수, 김종길 선생 세 분이었다.

응모할 때 모조리 가명을 썼다. 최종심을 하면서 원고지에 <고대신문>이라는 마크가 찍혀 있는 걸 보고 김종길 선생이 한마디 하셨단다. “아무래도 고대 영문과 오 아무개 작품 같은데 우리 대학을 다니는 학생을 당선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하셨단다.

그러니까 박남수 선생이, “작품만 좋으면 됐지 그게 무슨 문제냐” 하셨단다. 여기까지가 김종길 선생께서 늘 공개하는 리얼한 비화다. 아마도 내 상상으로는, 김종길 선생의 말을 들은 조지훈 선생은 그저 빙그레 웃으셨을 것 같다.

지난 세밑 한국시인협회 회식 자리에서도 김종길 선생은 또 한번 그 비화를 들려주셨다. 나는 짐짓 웃으면서 옆자리의 시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어휴! 하마터면 낙선할 뻔했네!”

나의 당선을 가장 기뻐한 분이 바로 김종길 선생이었다. “참신한 당선작… 눈부실 정도”라는 그야말로 눈부신 심사평을 쓰신 분도 김종길 선생이었다.

나는 앞으로도 선생께서 처음 공개하는 비화인 양 나의 등단 뒷이야기를 열 번 스무 번도 넘게 또 하시길 바라고 있다. 그 말씀 들으면서 나는, 어휴! 하마터면 시인 못 될 뻔했네! 하고 가슴을 또 쓸어내리겠지, 아마도.

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純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原始林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년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石炭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한 炭夫의 손으로

화차에 던져지는,

原始林 아아 原始林

그 아득한 世界의 運搬소리.

이층방 스토브 안에서 꽃불 일구며 타던

딴딴하고 강경한 石炭의 發言.

연통을 빠져나간 뜨거운 기운은

겨울 저녁의

無邊한 世界 끝으로 불리어 가

은빛 날개의 작은 새,

작디 작은 새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 내려 앉아

해뜰 무렵에 눈을 뜬다.

눈을 뜬다.

純白의 알에서 나온 새가 그 첫번째 눈을 뜨듯.

구두끈을 매는 시간만큼 잠시

멈추어 선다.

행인들의 귀는 점점 맑아지고

지난밤에 들리던 소리에

생각이 미쳐

앞자리에 앉은 계장 이름도

버스?스톱도 급행번호도

잊어버릴 때, 잊어버릴 때,

분배된 해를 純金의 씨앗처럼 주둥이 주둥이에 물고

일제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개짓.

지난 밤에 들리던 石炭의 變成소리와

아침의 숲의 관련 속에

비로소 눈을 뜬 새들이 날아오르는

조용한 동작 가운데

행인들은 저마다 불씨를 분다.

행인들의 純粹는 눈 내린 숲 속으로 빨려가고

숲의 純粹는 행인에게로 오는

移轉의 순간,

다 잊어버릴 때, 다만 기다려질 때,

아득한 世界가 運搬되는

은빛 새들의 무수한 飛翔 가운데

겨울 아침으로 밝아가는 불씨를 분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1967년)

 

오탁번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등단. 시집 <벙어리장갑> <손님> <우리 동네> <시집보내다> 등. 동서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정지용문학상, 한국시협상 등. 현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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